
<태조의 어도(御刀)>
사실 조선조정이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파격적인 인사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일로 당시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단숨에 전라좌수영으로 입명한 일이었다. 당시 사간원에서는 이러한 인사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물론 이순신의 이러한 인사에는 친구였던 류성룡의 배려도 숨어 있었지만 능력 위주의 인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때 이순신과 함께 발탁된 인물로는 가덕진 첨절제사로 승진하여 무계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마진 전투에서 전사한 손인갑, 밀양부사가 되었다가 임란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고 경주성 탈환작전을 성공시킨 박진,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변응정 등이 있다. 부산첨사 정발도 이때 추천받은 인물이며 행주산성에서 권율과 같이 싸웠던 수원부사 조경도 명단에 들어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개전초기 지휘관이 적을 너무나 몰랐다는 점이었다.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이유는 이렇게 전해진다.
'적은 이미 문경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서둘러 조령을 지키는 것보다 넓은 들에 적의 보병을 끌어 들여 이를 우리의 기병으로 요격하면 먼 행군에 지친 적을 가히 무찌를 수 있을 것이며 아군은 모두 훈련이 미숙한 새로 뽑은 군사인데다가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서로의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였으며 상하 단합도 충분하지 못하니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상주에서 패전한 이일이 이렇게 간했다.
'적은 경오, 을묘 때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치기 쉬운 적이 아니니 물러가서 지키는 것만 못하다.'
신립은 이일에게 상주에서의 패전을 이유로 화를 내며 선봉으로 삼았을 뿐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선조가 한양을 등지고 피난을 가서도 적을 제대로 모른 채 일본군에 대한 평가절하는 계속되었다. 선조실록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적도 장기(長技)라곤 별로 없고 오직 철환(鐵丸)과 단병(短兵)뿐입니다."
즉 일본군의 장점이라고는 조총과 단병접전뿐이라 조총에 대한 방비를 단단히 하고 성벽에 의지해 지킨다면 막아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간과한 것은 일본군의 신속한 전진이었다. 또한 여기에 실전경험이 없는 조선군의 허술함이 더해져 짧은 시일에 일본군이 평양과 함경도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실전경험이 없는 조선군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용인전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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