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사(冬至使)는 과연 얼마나 가고 싶은 정도의 일이었을까?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당시 무역품중의 하나였던 화문석(花紋席)

드라마 '이산'을 보니 동지사에 대해 나오던데요. 드라마에서는 동지사를 자청해서라도 가고 싶은 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장사로 크게 한 몫을 벌 궁리까지 하던데요. 이런 묘사는 '상도'에도 나왔지요.

영조 39권, 10년(1734 갑인 / 청 옹정(雍正) 12년) 11월 29일(경자) 1번째기사
동지 정사 윤유가 여색에 빠져 지체하다가 급히 도강하여 죽은 역졸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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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사(冬至使)의 행차가 비로소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정사(正使) 윤유(尹游)가 여색(女色)에 빠져 유련(留連)하다가 도강(渡江)할 날짜가 급박하여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밤낮을 달리니, 역졸(驛卒)들의 수족(手足)이 얼어 터지고, 죽은 자가 자그마치 10여 인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가는 일조차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동지사로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죽은 관리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수행원이 허가 받지 않은 장사를 하면 이렇게 되기도 합니다.

영조 103권, 40년(1764 갑신 / 청 건륭(乾隆) 29년) 4월 20일(신축) 1번째기사
간원에서 동지사 순제군 이달을 파직할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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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정언 구상(具庠)이다.】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잠상(潛商)은 저절로 해당된 죄율(罪律)이 있기 마련인데, 상사(上使)의 막비(幕裨)가 몰래 북경에서 물건을 사들이는 것부터가 중죄를 범한 것이어늘, 상사가 된 사람이 잘 검속하지도 못하고 되려 추한 비방이 많았으니, 청컨대 동지사(冬至使) 순제군(順齊君) 이달(李炟)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잠상, 즉 허가 받지 않은 상업행위를 막비가 한 것을 두고 파직까지 당합니다. 막비(幕裨)란 비장(裨將)과 같은 말이며 하급 무관을 얼컫는 말입니다. 물론 달리 보면 잠상으로 얻는 이익이 많으니 위험을 무릅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이런 규모의 잠상규모는 매우 미미했죠. 진짜 큰손은 역관들이었습니다. 정조때 이르러서는 청일간의 중계무역으로 이익을 보던 역관들의 상행위가 청일간의 직교역으로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때 이르러 동지사를 이용하여 잠상행위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이들 역시도 의주에 살고 있는 역관들이었습니다.

정조 36권, 16년(1792 임자 / 청 건륭(乾隆) 57년) 10월 12일(정축) 3번째기사
사신이 중국 갈 때 쓰는 쇄마의 수를 반으로 줄이고 수레로 대신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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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이 중국에 갈 때 쓰는 쇄마의 수와 소용되는 비용을 재감하였다. 이전에는 사신이 중국에 갈 때면 모두가 쇄마를【각 고을의 역말을 일컫는다.】 이용해 짐을 운반했는데 말을 부리는 자들이 대부분 무뢰배이거나 떠돌이 부류여서 책문에 들어간 뒤면 연도에서 싸움과 도둑질을 일삼았으나 사신과 역관이 말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저들이 보기를 도둑처럼 하여 사행에 수치를 남겼으므로 전후로 사행이 복명할 때면 그 폐단을 말하는 자가 많았었다. 그랬는데 지난해 서장관 성종인(成種仁)이 건의하여 쇄마로 짐을 운반하는 법을 혁파하고 그들을 고용하는 은화(銀貨)로 수레를 세내어 운반하자고 하였다. 이번 겨울에 상이 동지사 세 명에게 명하여 의주 부윤과 함께 그 편리 여부를 강구해보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군요. 게다가 인건비까지 중국보다 비싸다는 말이 뒤이어 나옵니다.

동지사는 겉으로의 목적보다는 사실 그 뒤로 얻는 이익이 많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공공 무역에 역관들과 그 수행원들의 잠상 행위까지 합하면 방대한 무역규모를 자랑했고 조선 조정에서는 명목만 있으면 이런 사절단을 파견하여 무역 이윤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관리들에게는 동지사 만큼 견식을 넓힐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 접한 각종 소식을 조정에 보고하는 일도 매우 중요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