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4 전쟁초기 왜 조선군은 무기력했는가?(3)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조선 환도>

<일본도>


치욕적인 용인전투


신립장군과 같이 조선군의 지휘관들은 전반적으로 적에 대해 무지했다. 지휘관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숙련도도 형편없이 떨어졌는데 워낙 어이없는 패배이다 보니 임진왜란 초기의전투를 얘기할 때 덜 얘기되는 용인전투의 상황을 들어보면 조선군이 쉽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절감할 것이다.


선조는 올라오는 일본군을 막기위해 임진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왕을 호위할 근왕병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전라감사이광은 전라, 경상, 충청의 3도에서 5만명의 병력을 모아 한양으로 진군하게 된다. 당시 권율도 휘하에 있었으나 모든 지휘권은 이광이 전담하고 있었고 그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이광은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갔다가 함락소식을 듣고 후퇴를 명했고, 이에 백성들의 불만이 있자 다시 출병을 할 정도로지휘관으로서는 소심한 인물이었다. 어쨌던 빠른 진군속도만 신경쓴 나머지 배후에 병력을 거의 남겨놓지 않아 취약하기 그지없었던일본군의 사정을 볼 때 이 병력이 제대로 활약을 해 준다면 일본군은 큰 곤경을 겪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머릿수만 많았지 훈련하나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고 지휘관인 이광 역시 자질이 모자라는 인물이다. 용인부근까지 진군한 조선 근왕병은 약 600여명의 일본군을 포위한다.

이광은 이 적군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권율등 다른 장수들의 의견은 달랐다. 얼마되지 않은 적군은 무시하고 임진강을 건너서 방어선을구축해 국왕을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조선군 장수들간의 의견조율이 안 되는 상태에서 일본군은 조선군의 숫자에 겁을 먹고 한양으로후퇴할 계획을 세운다. 한양에는 우키다의 본대가 있었으나 그 수는 2만이 채 되지 않았기에 우키다 역시 이에 전전긍긍할 따름이었다.

이때 일본에서 수군으로 출전한 와키자카 야수하루가 1천5백의 병력으로 조선군을 막겠노라 호언장담하며 나선다. 우키다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그에게 조선군을 막을 것을 지시한다.

그때까지 선봉장 백광언이 기병을 몰고나가 일본군의 목 10여급을 베어오고 목책을 불사르는 등 기세를 올린 조선군은 마침내 이광의 고집으로 인해 총공격을 하게 된다. 그 순간 한양에서 내려온 일본구원군 천오백명이 나타나는데, 와키자카는 휘하 장수들에게 귀신형상의 탈을 쓰게 한채 돌격 명력을 내린다.  여기에 지키고 있던 일본군이 호응하기 위해 조총을 쏘자 겁을 먹은 조선군은 장수들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않고 '뒤로 돌격'을 시작한다. 에초 머릿수만 많았지 훈련조차 받지 않은 농민 5만명은 군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모양새였다. 일부 병사들이 달아나자 5만명이 연이어 일제히 이천명의 일본군에게 쫓기는 일이 발생한 건데 일본군에게 죽은 수보다 도망가는 이들의 발길에 밟혀죽는 이들이 많을 지경이었다. 이런 집단적 붕괴는 곧 사방에 파급되어 공포로 확산되어 나간다.

각종 물자와 장비를 남겨둔 채 일본군 2천에게 쫓긴 근왕병 5만명이 와해되는데는 한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광은 결국 이 일로 인해 파직되고 만다. 이 패배는 조선에게는 탄금대 전투의 패배보다도 충격이 컷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일본군이 조선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여 수원, 이치, 행주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후방이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