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5 조총은 어떤 무기인가?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일본군의 주력화기인 조총(화승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아퀘부스를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실제 편성에서는 조총병이 부대의 20%를 차지하고 있었다. 화승에 불을 당겨놓고 방아쇠를 당겨 화약통에 불이 붙으면 그 충격으로 총알이튀어나간다.

사극을 보면 가끔 이런 화승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쏘기도 하고 환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면서 공중으로 쏘기도 하는데 그 실체를 안다면 어림도 없는 짓이다.

먼저 화승총의 사정거리는 50m이내지만 실제로는  유럽의 지휘관들이 머스켓 사격시 강조했던 '적가 얼굴이 마주쳐 눈동자까지 보일 때' 사격해야만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조총보다 후대에 유럽에서 쓰인 머스켓(화승이 아닌 부싯돌 발화장치를 가진 총)부대의 활용법은 양 부대가 줄지어 가깝게 접근한 후 마주보고 서로 총탄을 교환해야 교전이 이루어졌다. 총탄이 오고간 후 무너지는 쪽은 사격이 아닌 창이나 총검으로 마무리가 되곤 했다. 결국 상대편의 줄이 무너지고 도주하게 되면 다시 진형을 짤 수 없도록 그 뒤를 기병이 추격하여 칼과 창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렇게 전투중 대오가 무너지면 사격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교본에서는 화승총의 발사순서를 세분해서 적어놓았고 이는 동시대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으면 안전사고가 날 수도 있고 격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다급한 전투 상황에서 격발은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中 한 보고서(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가 끝난 후 전장에서 수거한총기들을 검사한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수거된 27,574정의 전체 총기 중에서적어도 24,000정은 장전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중 절반 가량은 두 발씩장전이 되어 있었고 1/4 가량은 3발에서 10발까지 장전되어 있었으며 나머지는한 발씩 장전되어 있었다. 두 발에서 여섯 발까지 장전되어 있던 총기들 중많은 수에서 화약은 한 발분밖에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몇몇 총기들은 총알이총구멍 안쪽에 들어 있었고 화약은 그 위에 장전되어 있었다. 다른 몇몇 경우에는58구경 종이 탄약통 여섯 개가 발견되었는데, 탄약통을 찢거나 뜯지 않은 채로총에 집어넣은 상태였다(이렇게 되면 뇌관이 탄약을 폭발시키지 못하게 된다).스프링필드 병기창에서 만든 한 정의 라이플-머스켓총에는 23발의 총알이 가지런히장전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정의 격발식 활강 머스켓총에서는 22발의 총알과62발의 사슴사냥용 총알이 그에 해당하는 양만큼의 화약과 함께 완전히 뒤죽박죽으로섞인 채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화약은 손으로 재어 넣어야 했는데 그 양이 적으면 '피식'소리를 내며 발사가 되지 않고 그 양이 많으면 폭발해버려 사수가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번 쏘면 총구에 낀 화약을 깨끗이 닦아내야만 했고 이러니 당연히 격발 속도도 느렸다.

후기에 발전된 머스켓도 '1분에 3발을 쏠 수 있으면 극도로 숙련된 사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보통은 1분에 2발을 쏠 수 있었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총부대는 3열로 줄지은 뒤 지휘관의 통제에 따라 1열부터 차례로 총을 발사하고 뒷열은 발포를 준비해 그 사이의 간격을 최소화 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일본 통일의 기반을 닦은 오다 노부나가의 전술이라고 전하나 그 실체가 과장된 학설이라는 비판도 있다. 다만 지휘관을 두어 조총의 사격간격이 벌어지지 않도록 통제한 것 만큼은 틀림없으며 이는 조총을 할용한 부대의 응용에는 필수적인 운용방식이지 '3단철포'가 천재적인 전술로서 치부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조총을 쓰게 된 이후로도 조선의 화승총 부대는 발포사이의간격을 메울 궁수부대를 계속 두기도 했는데 이는 적과 육박전을 벌이기 전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연속적인 화력의 생산이 그 시대 전술의 고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총의 이런 사격에 상대편이 무너지면 보병과 기병이 돌격해서 백병전을 전개하는 방식이 평지에서 일본군의 전술이었다. 그 이전 성능이 떨어지는 대나무 활을 장비하고 있는 일본군은 여러가지 성능좋은 활을 장비하고 있는 조선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조총의 등장으로  거의 대등하거나 때로 더욱 우수한 간접공격 무기를 장비하고 됨으로서 육박전에 유리한 일본군의 특성을 더욱 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  명, 일본의 병사들이 지닌 장기로서 조선은 활, 명은 장창, 일본은 칼이 아닌 조총을 꼽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일본도 내지 자루 긴 칼을 든 일본군만으로는 활을 든 조선군과 장창을 든 명군을 상대하기에는 벅찼지만 조총이 그 고민을 없애버린 셈이다.

일본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가 이 조총을 적극 활용함으로서 나온 말이 있다. 일본에서는 조총을 텟포(鐵砲 : 철포)라고 불렀는데 철포도 없이 돌진하는 부대를 보고 무텟보(無鐵砲)라고 놀려댄 일본어가 일제시대에 건너와 '무대포'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