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6 고니시 유키나가(1)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사진)노무현 대통령이 29일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 경복궁 집옥재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인 고니시 다카코를 소개하고 있다. /백승렬/정치/문화/ 2006.9.29 (서울=연합뉴스)



1592년 4월 13일 저녁, 부산 영도에 침입한 일본군 1진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여태껏 조선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선 1진을 지휘하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무사가 아닌 상인 출신이었으며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아우구스투스였다. 그의 집안은 약재상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명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여러 문물을 접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천주교를 신봉하게 된 것이었다. 그의휘하 장수들도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의 직속 부대 1만 8천의 사병 중에서도 2천명 가량이 천주교 신자였다.

고니시는 포르투갈의 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 우리나라에서는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를 초청해 전쟁이 1년 반을 넘어 교착상태에 빠진1593년 12월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부가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세스페데스는 일부에서 황당하게 주장하듯 포교를 위해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세스페테스가 작성한 기록에는 일본군 부대 순회일정과고니시 장군과 마련한 영내 예배, 군사들의 고해성사에 관한 것과, 일본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과 관련된 사항은 간접적으로 들은 전투상황이 주류를 이룬다.

- 세스페데스(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중 조선에 대한 부분


혹자는 부산진, 동래성 전투, 탄금대 전투등이 기록되어 있기에 세스페데스 신부가 줄곧 고니시의 부대를 따라다닌 걸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온 시기는 고니시가 부산에 머물러 있을 때였으며 명의 심유경과 함께 전쟁강화협정을 논의하고 있을 때였다.  세스페데스는 여기서 머물며 정보를 입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스페데스가 기술한 '일본사'에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 다룬 부분은 70장에서 79장까지다.

세스페데스는 일본예수회의 명령으로 일본사를 집필했는데 그는 정유재란 발발 1년 후 병사한다. 그의 집필내용은 오류가 많은데 그것은 그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저지른 오류임에 틀림없다. 이 밖에도 고니시의 부대에는 조선사정에 밝은 겐소라는 중이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여러모로 조선으로의 출병에 적극성을 보이는 장수는 아니었다. 일본내에서 당시 은근히 경계의 대상이 되어가던 천주교 신자였고, 무사계층에게 호감을 가지지 못한 상인출신이었다. 그런데도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고니시를 1군으로 조선에 내보내었을까? 그의 지략이 뛰어나 히데요시의 개인적 신임을 얻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여기서 '일본내의 불만 세력들을 해외원정으로 무마시킨다.'라는 원칙도 상당히 적용되었음을 알 수있다.


(고니시 유키나가 2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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