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법(禮法)이 뭐길래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14일(계해) 5번째기사
난리 후 부모의 상에도 예법을 행하지 않는데 상복을 입고 상례를 따를 것을 명하다

--------------------------------------------------------------------------------
 
상이 이르기를,
 
“환도(還都)할 때 보니, 경성의 백성들 중에 상복을 입은 자가 없었다. 흉악한 적들에게 죽은 자가 필시 많을 것인데 상복을 입지 않았기에 괴이하게 여기고 전교(傳敎)하였었다. 비록 전쟁 때라지만 법사(法司)에서는 규정(糾正)하여 상복을 입게 하라.”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전쟁이 일어난 이후 상기(喪紀)가 없어져 어떤 이는 의병이라 핑계하고 마음대로 기복(起復)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부모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고기를 평상시처럼 먹고 있습니다. 윤기(倫紀)가 무너졌다 한들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중대한 관련이 있는 자는 조정에서 기복(起復)하게 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상복을 입지 않게 된 것은 자못 괴이한 일이다.”
 
하니,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거상(居喪)하는 자가 고기를 먹고 기복하면 흑의(黑衣)를 입어 점점 오랑캐 풍속에 물들고 있습니다.”
 
하고, 정곤수(鄭崐壽)가 아뢰기를,
 
“지난 을묘년에 기복하였던 사람은 모두 흰 옷과 흰 신을 착용(着用)하였고 관원들은 오모(烏帽)와 각대(角帶)만 착용하였을 따름이었는데, 오늘날에는 평인(平人)과 같이 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병란 때에 여자로서 절의(節義)에 죽은 자가 아주 많습니다. 신이 전에 동파(東坡)에 있을 적에 양주(楊州) 백성 임환수(林環壽)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처가 두 딸을 데리고 왜적을 피하여 도봉산(道峯山)에 들어갔다가 두 딸이 모두 적에게 잡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막내딸 향옥(香玉)은 당시 나이가 16세였는데 그 어미더러 말하기를 ‘언니는 적을 따라가는데 저들에게 시집가려는 것입니까? 꼭 아버지에게 말하여 내 시체나 거두게 하소서.’ 하고는 드디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 하니, 비록 청풍령(靑楓嶺)의 일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같은 사람이 포장(褒奬)되지 않는다면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오경에 파하고 나갔다.
 
 
---------------------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논의일 것이다. 임진왜란의 난리통에 상복을 챙겨입을 겨를이 있겠는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홀로 무덤가만 지키고 있을 것인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저런 논의들이 부질없고 허세를 부리는 짓으로 밖에는 안보인다.

하지만 효(孝)와 예(禮)가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나라인 조선에서 이러한 것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는건 기득권층에서는 외침보다도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런 기득권의 이런 의식이 전란후에도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융통성은 없지만 원칙은 지켰던 셈이다. 원칙도 무시하면서 융통성도 없는 오늘날의 몰지각한 이메가 부류들과는 그러한 점에서 다르다.

재미있는건 선조를 비롯한 신하들이 사람들의 예의 없음을 질타하는 와중에 유성룡만큼은 절의를 지킨 여인을 언급하여 그러한 분위기를 슬쩍 눙치고 있다는 점이다. 효와 예를 강조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런 질타가 너무 과하다는 걸 유성룡은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복(起復) :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가는 것
*오모(烏帽) : 검은색 모자의 통칭
*각대(角帶) : 관원들이 차는 뿔조각이 붙어 있는 허리띠
*포장(褒奬) : 칭찬하고 장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