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7 고니시 유키나가(2)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임진왜란 당시 일본장수들의 갑옷



평양에서 멈춰버린 고니시의 진군



고니시의 1군은 승승장구하여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단 두달만의 일이다. 선조는 국토의 끄트머리인 의주까지 피신해 명나라에 망명할 논의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고니시는진군을 멈추고 7월 17일 조명 연합군이 처음으로 평양을 공격할 때까지 무려 한달 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왜그랬을까?


첫번째 가설은 보급에 차질을 빚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할 무렵 이순신 함대는 일본군함대를 계속 격파시켜 나가며 서해방면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린다. 게다가 각지에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은 고전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륙양면에서 보급을 받지 못해 평양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짐작된다.


하지만 이 가설은 한가지 중대한 약점이 있다.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할 당시 그곳에는 조선군이 후퇴하며 고스란히 남긴 양곡 수십만 섬과 무기까지 비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가설은 고니시가 전쟁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니시는 일본장수 중 처음으로 강화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군의 전황과 고시니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있었을 때였고 굳이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망설인 것은 의문이다.


고니시는 더 이상 진출했다가 명나라 군대가 투입되는 것이 두려웠을지 모른다. 히데요시는 명을 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고시니는 내심 이를 바라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에 앞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니시가 '사실상 조선 정벌은 끝났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고니시를 비롯한 일본군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일본은 당시 전국시대의 혼란이 끝나고 지방 영주시대를 겨우 벗어나려는 시기였다. 이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영주가 존재하고있다는 것이 아닌 영주가 지배하고 있는 땅이었다. 이를 지키기 위해 성곽을 높게 쌓아 올렸고, 땅이 점령당하면 영주는 할복을하던 도피를 하던 간에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무사집단에서는 자신들의 우월감으로 인해 신의를 얘기하며 영주의 복수를 위해끝까지 항전하기도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저 '또 주인이 바뀌었다'라는 인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선조의 몽진으로 혼란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수도가 외적에게 점령당해도 군주가 있는 한은 그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유교적 의식이 조선에는있었다. 일본군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영토만 점령하면 백성들은 그저 따라온다는 의식을 가지고 유화정책을펴기도 했고, 이는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어 조선체제에 불만이 있는 이들을 자기편으로 흡수하기 까지 했다.(이에 대해서는 후에 추가할 예정) 하지만 동시대의 일본에 대해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조직적으로 의병을 조직해 끈질기게 싸우리라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의식의 차이로 인해 고니시는 평양에서 더 이상 진출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고니시는 후에 명의 심유경과 짜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짜 항복문서를 작성해서 강화를 맺으려고 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하다가 2군사령관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야스에게 대항해 서군의주력으로 참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싸웠지만 패배한 후 처형당한다. 그가 신봉하던 천주교도 박해 당해 결국 일본에서는 천주교의 저변이 확대되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