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에피소드 3- 백성을 생각했으나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5월 11일(갑신) 1번째기사
영의정 유상운 등이 청나라 시랑이 쌀과 물화 무역을 요구한 사실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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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치계(馳啓)하기를,
 
“청(淸)나라 시랑(侍郞)이 말하기를, ‘사미(私米)와 화물(貨物)을 귀방의 상인과 황상(皇商)이 값을 정하여 무역하게 하여야 하오.’ 하고, 인하여 주문(奏文)의 제본(題本)을 보내어 보여 주었는데, ‘상인들은 황제의 은혜를 입고, 공탕(公帑)을 차용하여 쌀을 사서 상품을 무역한다.’는 따위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살펴보건대, 시랑이 신으로 하여금 교역을 주관하라는 것이란 오로지 사미와 물화의 매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들은 이미 바다를 건너 멀리 와서 황상을 칭탁하고 있으니, 아주 막는다면 반드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경외(京外)의 부민(富民)으로 하여금 원하는 자는 와서 무역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할 때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저들이 더욱 절박하게 압력을 넣고 있으나 교시(交市)의 가격도 아직 정하지 않았고, 공미(公米)와 백급미(白給米)9562) 도 교부받지 못하였다고 하니, 사상의 허락 여부에 대해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신이 남구만(南九萬)에게 가서 상의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정(鄭)이 비록 약한 나라였으나 진(晉)과 초(楚)가 감히 공격하지 못한 것은 자산(子産)이 외교 사령(外交辭令)에 능숙했기 때문이다. 만약 국서(國書)로 이부(吏部)에 이자(移咨)하여 이르기를, 「육운미(陸運米)와 해운미(海運米), 그리고 상여한 쌀은 모두 황제의 특별한 은혜이므로 감격하여 받았으나, 사미(私米)는 이미 자문에 언급되지 않은 것이라서 사체(事體)로 보아 매매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 나라로서는 이치에 맞아서 도리어 막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의견은 자산이 대처한 것은 교린(交隣) 관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에 있어서는 옛날에 피폐(皮幣)로써 섬겨도 면하지 못한 사례가 있었고, 또한 예와 지금이 사정이 달라서 오로지 사리의 옳고 그름만을 믿기에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저들은 이미 동국의 백성을 근심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도리어 이익을 겨냥한 계책을 내어 반드시 그들 사상의 매매하려는 야욕을 성취하려고 하니, 비록 국서를 보내어 다툰다 하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저지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대신과 여러 신하에게 하문하시어 재결 처리하소서.”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아뢰기를,
 
“물화는 본시 허락할 수 없지만 쌀은 허락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유독 삼사(三司)에서는 아뢰기를,
 
“쌀이고 물화고 모두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오랑캐와 금수는 의리로써 책망할 수 없는 것이다. 쌀은 백성을 구제하는 물건이라 허락하는 것이 옳겠지만, 물화의 매매는 단정코 허락할 수 없다. 아직 국서는 보내지 말고 개인적인 서신으로 서로 통보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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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인 즉, 청나라 상인들이 시랑(육부의 차관급 벼슬)을 통해 교역을 요구하면서 청나라황제의 명을 핑계로 삼고 있는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숙종 연간에는 청, 일본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많은 이익이 쌓이자 무역 분쟁이 잦았는데 이 일도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남구만이 공자도 존경해 마지 않았다는 정나라의 재상 자산을 예로 들며 일부는 교역을 허락하라고 일부는 허락하지 않는 정책을 일러주었지만 우의정 최석정은 청과의 관계를 염려해 이를 국정현안으로 상정한다.

거듭된 흉년으로 쌀이 부족하고 은은 남는 판국이라 신하들은 쌀의 교역만을 허락할 것을 청하지만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는 모든 교역을 불허하자고 주장한다. 이에 숙종은 '쌀은 백성을 구제하는 물건이라 허락'한다고 답한다.

결과는? 쌀에 한해서 1만석가량을 들여오는(그중 4분의 1은 무상인 조건)교역을 하게되나 그 가격을 정하는데에 있어서 한동안 시일을 끌었다. 결국 정해진 가격이 1곡(斛 : 열말 정도 약 180리터)마다 은(銀) 5냥 7전이었는데 이는 공식적인 가격보다 무려 5.7배가 뻥튀기가 된 가격이었다. 이러니 값을 깎아 나라에서 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내다팔았지만 그래도 가격이 비싸 백성들이 이를 원하지 않았다. 삼사에서는 청과의 무역협상을 제대로 하지못한 우의정 최석정을 파직하라고 상소를 올리고 이를 거부하던 숙종은 결국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삼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최석정의 삭탈관작과 문외출송을 원하나 거기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관은 우의정 최석정이 주축이 된 통상협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청나라의)글 속에 쓰여진 말들이 오만하고, 명첩(名帖)은 지극히 패악하여 신자(臣子)로서 놀랍고도 몹시 박절함이 어떠하겠는가? 최석정은 이미 좋은 말로 주선하지도 못하였고, 또 의(義)를 들어 물리치지 못한 채 마침내 그 말을 그대로 임금께 보고하였으며, 장계(狀啓)에서 사용한 말 역시 조금도 놀라고 동요하는 빛이 없었으니, 아! 통탄할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삽질 협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통탄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은의 유출이 생기는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막은 실적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비판을 들었던 셈이다. 이를 지금 2MB와 비견해보면 어떨까?


*공탕(公帑) : 나라의 금고, 내탕고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