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9 도움이 되지 않은 명나라(2)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공격도

임진왜란이 끝난후  후금의 명나라 침입이 개시되자 명나라는 과거의 은혜를 얘기하며 조선에 파병할 것을 요구한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임명하면서 이렇게 밀지를 내린다.

'전황을 보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행동하라.'

하지만 그 후에 인조 때는 오로지'명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청나라의 침입을 받게되고 만다.

이는 6.25 참전과 주한미군의주둔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극단적 친미주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도 전쟁의 상흔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서인 사대부 계층을 비롯한 일부 백성들은 '은혜의 나라'라고 명나라를 칭송하고 절대적인숭명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반면 이에 반해서 북인 사대부 계층과 백성들은 착취와 횡포를 당한 경험으로 인해 명나라에 대한 호감이 없었다. 이런 이해관계의 충돌은 결국 인조반정으로 나타난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사들이 들어오면서 무신(武神)관우 숭배 사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명나라 군사들이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들과 싸우는 데 큰도움을 주었다고 말했기에 명나라의 장수 진유격이 한양에 있는 북악산 꼭대기에 관왕묘를 세우고, 석상을 만들어 앉히고, 석상 옆에관운장이 자기들과 조선을 도운 사실을 기록한 비를 처음으로 세운 게 유래였다. 사실 진유격의 말은 핑계에 불과했고 자신이 평소에 믿던 무속신앙을전파했다는 것뿐이었다. 이런 명군의 반강요로 선조가 관왕묘에 직접 분향제배 의식을 하기도 해야했다.

▶보물 제142호 서울 동묘(관왕묘) 이 사진은 조선말기 동묘의 풍경


일본의 일부 사학자들 중에는 임진왜란을 조일 간의 전쟁이 아닌 엉뚱하게도 명일간의 전쟁으로 보려는 이도 있다. 이들은 명의 참전으로 급격히 확산된 조선 지배층의 사대주의를 염두에 두고 '당시 조선은 주체성이 없었다.'라고 비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시대에 조성된 식민사관의 핵심이며 역사적 실체의 접근 보다는 한가지 사실을 부풀려 전체역사를 왜곡시키는 일본인 특유의 성향이 반영된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 있으니 서울대 이영훈이란 교수가 그렇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명군의 참전은 초기에 잠깐 활약이 돋보였을 뿐 그 이후로는 전투를 기피했으며 당시 서민층은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와 착취에 때로는 왜군의 침략보다 더 큰 괴로움을 겪은 게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