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일식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폰카로 촬영한 오늘 일식 (안습 ㅠ)

태종 11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6월 6일(갑자) 2번째기사
일식의 예측을 잘못한 서운관 부정 박염을 동래로 귀양보내다

원래 일식이나 월식이 있으면 구식(救食), 즉 임금이 소복 차림으로 근정전밖 섬돌 위에 나아가 해나 달이 나오기를 비는 의식이 있었다. 그런만큼 일식 예측을 잘못하면 그만한 책임도 뒤따랐다.

반면 일식을 맞추어 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성종 170권, 15년(1484 갑진 / 명 성화(成化) 20년) 9월 2일(병술) 3번째기사
일식의 추산을 착오없이 한 조희윤에게 아마 한 필을 내리다

일식(日食)을 추산(推算)한 관원 조희윤(曺熙胤)에게 아마(兒馬) 한 필(匹)을 내려 주었으니, 추산(推算)을 착오없이 했기 때문이었다.

세종때는 일식 예측시간을 15분 틀리게 예측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은 이도 있었다.

세종 15권,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월 1일(기미) 2번째기사
일식이 있어 인정전 월대 위에서 일식을 구하다
 
일식이 있으므로, 임금이 소복(素服)을 입고 인정전의 월대(月臺) 위에 나아가 일식을 구(救)하였다. 시신(侍臣)이 시위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백관들도 또한 소복을 입고 조방(朝房)에 모여서 일식을 구하니 해가 다시 빛이 났다. 임금이 섬돌로 내려와서 해를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추보(推步: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 하면서 1각(刻)을 앞당긴 이유로 술자(術者) 이천봉(李天奉)에게 곤장을 쳤다.
 
 
일식, 월식때는 삼가하는 일도 많았다.

세종 54권, 13년(1431 신해 / 명 선덕(宣德) 6년) 12월 20일(신해) 2번째기사
일식과 월식으로 삼가할 일들을 당부하다
 
예조에 전지하기를,
 
“일식과 월식은 천변의 큰 것이니 마땅히 음악을 끊고, 형륙(刑戮)을 제거하고, 짐승의 도살(屠殺)을 금지하고, 조회와 시장을 정지시켜 천변을 두려워해야 될 것이니, 그것을 상정소 제조와 함께 헤아려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세종때는 일식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으면 구식례를 치르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세종 117권, 29년(1447 정묘 / 명 정통(正統) 12년) 8월 1일(경신) 2번째기사
일식이 있었으나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다

서운관(書雲觀)에서 보고하기를,
 
“오늘 신시(申時)로부터 유시(酉時)까지 일식(日蝕)이 있을 것이오나 짙은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아니할 것이오니, 구식(救蝕)하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하니, 각도에 유시를 내려 해의 먹히는 푼수(分數)를 알아보게 하였더니, 혹은 짙은 구름이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하고, 혹은 신시(申時)에 서북간(西北間)에서 먹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세조때에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구식례를 치루었고 이후에는 전례를 두고 설왕설래한 기록이 종종 보인다.

이렇게 일식때의 구식례 시대가 흘러가면서 때에 따라 예를 정중이 갖추어 치뤄지기도 하고 대충생략되기도 했다. 구식례는 고종때 형식적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지식인에 자주 소개되는 '엽기조선왕조실록'의 일식부분을 보면 일식을 맞이한 구식례가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을 치며 해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양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물론 일식의 실체는 잘 알지 못했지만 '때가 되면 일어나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던 당시 과학수준을 너무 경박하게 폄훼하는 글이다. 과거 일식때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일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의 동요가 있을 수 있기에 의식을 치르게 된 것이 예법으로 정착된 것이다. 이런 실체를 알기에 세종때는 구름이 끼어 해가 보이지 않으면 구태여 구식례를 치르지 않기도 한 것이다.  구식례는 조선 중기때는 흐지부지 되다가 예법을 다시 강조한 영조때 엄격하게 치뤄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