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비차는 기구의 원리를 이용해서 날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 설을 따른다면 기록과도 맞아 떨어진다. 기구라면 행글라이더와는 달리 4명이 탈 수 있으며 '풀무질을 해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을 지펴서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내 상승한다는 것을 표현한 기록으로 보인다. 항공사관학교에 있는 비차모형에 대한 신중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비차는 후대에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졌을까?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는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오른다는 점에 착안해 더운 공기로 채운 열기구를 만든다. 동물을 태운 몇 번의 실험을 거친 후 그들은 드디어 국가적인 지원을 얻어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앞에서 고도 9백50미터로 25분간에 걸쳐 약 8킬로미터를 날았다.(이 정도면 2명을 태우고 30리를 날았다는 비차와 비견될만 하다.)
-몽골피에 기구
소문이 퍼지자 군비경쟁이 한창이었던 유럽 각국에서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기구를 개발하였다. 나폴레옹은 기구를 정찰용으로 사용하였고 얼마 뒤에는 오스트리아가 폭격용으로 기구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구에 올라간 병사에게 상대방은 집중사격을 가했고 기상변화시 기구는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기 일쑤였다. 결국 생존율이 극히 낮아 지고 기구에 오르는 것을 꺼리는 병사들이 많아지자 지휘관들도 이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더 운행이 자유스러운 기구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 비행선이었으며 이는 1852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험운행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1903년에는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기를 발명한다.

이를 토대로 볼때 조선의 비차가 왜 후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 첫 개발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긴박한 상황속에서 큰 전공을 세우지 않는한 국가적인 지원을 크게 받을 수 없었다.
-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믿음을 줄 수 있는 도구는 아니였으며 사고의 위험성이 높았다.
- 수 백 년동안 군비경쟁이 필수였던 유럽과는 달리 동북아의 정세는 금방 정리되었고 그로인해 비차와 같이 삶에 직결이 되지 않는 발명품은 더 이상의 발전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비차는 후대에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졌을까?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는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오른다는 점에 착안해 더운 공기로 채운 열기구를 만든다. 동물을 태운 몇 번의 실험을 거친 후 그들은 드디어 국가적인 지원을 얻어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앞에서 고도 9백50미터로 25분간에 걸쳐 약 8킬로미터를 날았다.(이 정도면 2명을 태우고 30리를 날았다는 비차와 비견될만 하다.)

소문이 퍼지자 군비경쟁이 한창이었던 유럽 각국에서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기구를 개발하였다. 나폴레옹은 기구를 정찰용으로 사용하였고 얼마 뒤에는 오스트리아가 폭격용으로 기구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구에 올라간 병사에게 상대방은 집중사격을 가했고 기상변화시 기구는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기 일쑤였다. 결국 생존율이 극히 낮아 지고 기구에 오르는 것을 꺼리는 병사들이 많아지자 지휘관들도 이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더 운행이 자유스러운 기구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 비행선이었으며 이는 1852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험운행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1903년에는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기를 발명한다.

-1835년 영국에서 설계된 비행선 모형
이를 토대로 볼때 조선의 비차가 왜 후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 첫 개발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긴박한 상황속에서 큰 전공을 세우지 않는한 국가적인 지원을 크게 받을 수 없었다.
-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믿음을 줄 수 있는 도구는 아니였으며 사고의 위험성이 높았다.
- 수 백 년동안 군비경쟁이 필수였던 유럽과는 달리 동북아의 정세는 금방 정리되었고 그로인해 비차와 같이 삶에 직결이 되지 않는 발명품은 더 이상의 발전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