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목의 행방은?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향가를 접하게 되면 진성여왕 2년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되었다는 '삼대목(三代目)'의 행방에 대한 아쉬움과 궁금증이 남게 된다. 이 삼대목이 발견된다면 고대 국문학 자료가 얼마나 풍부해 질 것인가!
 
그나마 삼대목을 언급한 사료조차도 삼국사기 밖에 없다. 그렇다면 삼대목은 아예 일찌감치 후삼국기에 소실되어 버린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삼대목이 꽤 후대까지 내려왔다는 심증은 있다. 바로 향가 14수를 수록한 삼국유사가 그렇다.

삼국유사는 현존하지 않고 있는 많은 참고 사료를 언급하고 있다. 대표적인으로 '가락국기'와 '고기'가 있다. 삼국유사가 편찬된 시점은 몽고전란 이후다. 그렇다면 몽고침입기 이후에도  사료들이 소실되지 않았다는 걸 추측해볼수 있다. 이런 와중에 일연스님이 삼대목을 참조해 향가를 옮겨적었을 가능성이 있다. 향찰로 기록된 향가가 일괄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대목대목 마다 인과성을 가지고 등장하는 걸로 봐서도 일연스님이 채록하여 적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그 사점에 삼대목이 존재했다는 가정하에서) 누락된 향가들은

1. 단순히 사랑을 노래하거나
2. 자연을 찬미한 향가
3. 평민들의 삶을 이야기한 향가
들일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고려사>지(志) 권24 악조(樂條)를 보면 "속악인 즉 상스러운 말이 많아 심한 것은 다만 그 노래 이름과 지은 뜻을 적었다.' 라고 하니 삼대목이 인위적으로 파기되었을 가능성 또한 크다.

그렇다면 그런 가정하에서 왜 '삼대목'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서 언급된 이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아마도 삼국유사가 삼대목을 참조해 향가를 기록했다는 가정하에서도 그 당시 이미 삼대목은 상당부분 훼손된 상태(더군다나 불경을 간행할때 외에는 목판인쇄가 일반화된 시기도 아니었으니)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심지어 삼대목의 편찬자인 대구화상이 지었다는 향가조차 전해지지 않으니......

참고로 이름만 전하는 향가들중 대표적인 것들을 열거해 보면. (출처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앵무가><현금포곡(玄琴抱曲)><대도곡(大道曲)><문군곡><양산가><해가(海歌)><태평가><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신회작가(神會作歌)><동경곡 (東京曲)><회소곡><회악><신열악><돌아악(突阿樂)><지아악(枝兒樂)><사내악(思內樂)><우식곡(憂息曲)><대악><간인(竿引)><미지악(美知樂)><도령가(徒領歌)><날현인(捺絃引)><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내지(內知)><백실(白實)><덕사내(德思內)><석남사내도(石南思內道)><사중(祀中)><치술령곡><달도가><번화곡(繁花曲)><이견대가(利見臺歌)>




무애가(無▩歌) : 신라의 가요. 태종무열왕 때 원효가 지어 불렀다는 노래. 그가 파계하여 속인이 되었을 때<화엄경(華嚴經)>의'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人, 一道出生死)'의 가르침에 따라 부른 노래라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현금포곡(玄琴抱曲) : 신라 가요.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화랑 격원랑(激元郞) 등이 지음. 그들이 금란사(金蘭寺)에서 놀다가 은근히 나라를 위해서 일할 뜻을 읊은 가요라 한다. 그 가사는 전하지 않고, 유래만<삼국유사> 권2 경문왕조에 전한다.

망국애가(亡國哀歌) : 신라의 가요.경순왕(敬順王) 때 아간(阿干) 신회(神會)가 지었다 한다. 신라가 고려에게 망하자 신라 서울의 쓸쓸함을 보고 이를 슬퍼해 불렀다는 노래로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목주가(木州歌) : 신라의 가요.지금의 충청도 천안(天安)에 사는 어느 효녀가 지었다 한다. 노래는 전하지 않고, 지어진 유래만<고려사> 권71에 전한다. 유래는 목주에 한 효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계모를 효도로써 섬기었다. 그러나 계모는 그녀를 모함했고,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어느 석굴 속에 사는 할멈의 구원을 받아 그 며느리가 되어 열심히 일을 한 끝에 부자가 되었다. 후에 부모가 재산을 탕진하고 고생한다는 소문을 듣고 모셔다가 섬기었으나 역시 미움을 받았으므로 그 애틋한 심정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번화곡(繁花曲) : 신라의 가요. 경애왕(景哀王) 때 김위응(金魏膺, ? -927)이 지었다 한다. 왕이 포석정(鮑石亭) 잔치 때에 두 미인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하지만 가사는 전하지 않고<증보 문헌비고> 권106에 한역가가 전해져 온다."祇園 實際兮 二寺東 兩松相依兮羅中 回首一望兮花滿塢 細霧輕雲兮竝濃(기원에 실제 두 절의 동쪽에 두 그루 소나무는 겨우살이 속에 의지했다.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꽃은 언덕에 가득찼는데 가는 안개 가벼운 구름은 다 같이 몽롱하구나)."

방등산곡(方登山曲) : 신라의 가요. 신라 말 장일현(長日縣=옛 백제 땅)의 어떤 여인이 지었다 한다. 신라 말 온 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 도둑들이 성행. 나주(羅州) 속현(屬縣)인 장성(長城) 방등산에 진을 치고 양갓집 부녀자들을 약탈해 가자, 그 속에 있던 장일현의 여인이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음을 풍자해서 부른 것. 가사는 전해 오지 않고 노래의 유래가<고려사> 권71에 전한다.

앵무가(鸚鵡歌) :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 원년(826)경에 왕이 지은 노래.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삼국사기> 권10 흥덕왕조에,"12월에 왕비 장화부인이 돌아가므로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했다. 그러나 왕은 비의 생각을 잊지 못해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군신들은 상소하여 비를 맞을 것을 청하니 왕은 말하기를'한 쌍의 새가 짝을 잃는다 하더라도 슬퍼하는데 항차 사람으로서랴. 좋은 배필을 잃었으나 어찌 그 마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아내를 맞을까 보냐' 하고 드디어 그 말을 좇지 아니하고 또한 여자를 대하여 친근하게 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흥덕왕이 왕비를 잃은 슬픔을 노래로 지었으리라 추측된다.<삼국유사> 권2 흥덕왕조에"왕이 즉위한 지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당나라로 사신을 갔다 올 때 앵무 한 쌍을 가져왔다. 그런데 암놈이 죽고 수놈만 남아 슬피 우는지라 왕이 거울을 앞에 걸게 했더니 거울을 보고는 제 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다가 죽었다. 왕이 이를 슬피 여겨 노래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