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12 2차 진주성 전투의 비극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교토의 토요쿠니신사에 있는 귀무덤


 임진왜란중 일어난 일 참상중에서도 최대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2차 진주성 전투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김시민 장군의 분전으로 조선군이 큰 승리을 거둔다. (1592년 4월)

 그 후 1592년 6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이때, 전해의 비참한 패전에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의 모든군관민을 몰살시켜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전에 없었던 이래적인 명령이었다. 일본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당시 조선에 진군한 병력의 거의 전부인 10만명을 동원에 보름만에 진주성을 함락시킨다. 진주성이 함락된 후 삼천 오백명의 조선군과 진주성에 대피해 있던 육만여명의 주민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다.

 일본이 전 병력을 동원할 때 왜 조선이나 명군은 진주성을 구원하러 달려오거나 그 배후를 노리지 않았을까? 몇몇 사람들은 당시 도원수인 권율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역시 문제는 명군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 있지만 군사 작전권이 모두 명군에게 넘어간 것이 참화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명군과 조선군은 사전에 일본군의 집결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명군은 거의 지리멸렬한상태의 일본군을 한양에서 무사히 철수하도록 방조한 뒤 강화회담을 맺으려 했다. 이는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우위를 지키려는 속셈에서였다. 기껏해야 명군은 사신을 보내 '진주성 공격을 그만둬라.'고 거드름을 피울뿐이었다. 물론 일본측은 이런 명나라의 요구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몇몇 조선군 의병장과 관군들은 진주성으로의 진군을 시도 하기도 했지만 이미 집결이 완료된 일본군을 소수의 부대로 저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진주성 안에 있는 군관민이 대피를 해야할 입장이었지만 진주성을 순순히 내어주는 것은 호남으로 행하는 길을 그냥 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군관민들은 항전을 선택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성을 비우자는 공성론도 만만치 않아 결과적으로는 지원군이 적극적으로 진주성을 구원하지 않은 점도 있었다.

이런 전략적 선택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면,

왜인 중에서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소문만 듣고도 먼저 달아나 한 번도 정식으로 대적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건장한 군사들이모두 죽지 않고 흩어졌다가 다시 합하여 곳곳에서 왜중(倭衆)을 초살(勦殺)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행장이반드시 진주성을 버리라고 한 것은 일부러 그들을 완전히 집결하게 하여 섬멸시키려 한 것이다.’ 하였다.

왜인이 강항(姜沆)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장사들이 진주성에서 다 죽었으니, 이후로는 우리를 괴롭힐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그 뒤에 이간질을 하여 이순신(李舜臣)을 떠나게 만들고 원균(元均)을 패하게 만든 것도 모두 깊은 기모(機謀)에서 나온 것이다.

선조 수정 실록의 이 기록은 일본군의 진주성 학살이 주도면밀한 계획에서 나온 것임을 반증한다. 더욱이 진주성은 완전히 고립되었기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패할 수 밖에 없었던 전투를 선택한 조선 군관민들의 심정을 어때했을까?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진주성의 패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다.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들은 다 서울의 시정에서 모집한 무리들이며, 천일 또한 兵法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 고집이 너무 지나쳤다.게다가 평소부터 서예원을 미워하여 主와 客이 시기했으므로 호령이 어긋나고 틀려서 이 때문에 크게 패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의병장 안방준은 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기에 일본군의 호남 진출이 저지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차진주성 전투의 학살 이후 일본에서는 치욕의 역사 중 하나인 귀무덤, 코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노약자와 아녀자등 비전투원이라는 점에서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