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13 논개를 둘러싼 4가지 논쟁(1)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2차 진주성 전투이후 유명한 일화중 하나인 논개의 의거는 사실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못했다. 백년이 휠씬 지난 후에야 진주선비들의 탄원에 의해 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논개의 사적비와 사당이 세워지게 된다.

논개에 대한기록은 류몽인의 어우야담에서 비롯되는데 여기서 첫 번째 논쟁이 벌어진다. 논개에 관한 내용이 '논개는 진주관기였다.'로시작되었고 이후의 기록들, 심지어는 조선왕조 실록조차도(고종때 충청도 유생 백낙관의 상소문을 보면 논개를 기생으로 얘기하고 있다.) 이를 따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당의 이름도 의로운 기생이란 뜻의 '의기사'로 붙여진다.

그런데순조때 이를 중건하면서 이름을 '의로운 낭자의 사당'이라는 '의랑사'로 고친다. 현재는 6.25때 불타버린 사당을 복원하며다시 의기사로 되어있다. 이런 사실을 들어 일각에서는(특히 논개의 가문이라고 알려진 신안  주씨 가문의 반발이 심했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왜장에게 접근하는 바람에 기생으로 오해받아온것이다. 경상우변사 최경회의 부실(첩)이다.'라는 주장을 제기하게 단다. 즉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일반 양가집 규수라는 얘기다. 심지어 어떤이는 조선시대의 기록을 무시하고 논개 기생설은 일제시대때 조작되었다고 까지 얘기한다.

이런 논쟁은 논개를 둘러싼 논쟁중에서도 가장 부질없는 논쟁이었다. 논개가 기생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논개가 한 의거로 인해 후세에 추앙을 받는 것이지 그 신분으로 인해 폄하되거나돋보이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수 백년이 흐른 지금도 한 인물의 신분에만 신경 쓰는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논쟁은 친일전력이 있는 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주 논개 부인 영정'이 폐출논란에 휘말린 일이다. 이로 인해 시민운동까지벌어지게 되는데 이 논쟁은 십여년을 끌어오다가 2005년 5월 10일 진주시민운동본부에서는 이 영정을 강제로 뜯어내어 벌금형을 선고받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김은호의 그림은 친일논란 외에도 복식 고증이 맞지 않고 표준영정을 따르지 않는등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김은호의 논개영정은 퇴출되게 되고 논개 영정 현상공모끝에 윤여환교수의 작품이 당선되게 된다.

-윤여환 교수의 논개 영정 당선작


"논개영정을 그리기 위해 신안주씨 문중 후존 48명의 얼굴과 몸을 촬영한 뒤 '얼굴연구소'에 의뢰해 논개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얼굴 모형을 찾았다. 또 그는 복식과 장신구 등에 대해서도 전문가한테 의뢰에 고증을 거쳤다." - 윤여환 교수

이 당선작이 그대로 의가사에 걸리는 것은 아니고 2007년 완성및 심의완료를 예정으로 논개 영정은 표준양식을 따라서 2점이 제작중에 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