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을 건너온 경상좌병사
병사들을 이끌고 임진강에서 진을 치고 있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1534~1602)은 자신 앞으로 기어 오다시피 한 자를 보고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커다란 체격과 거친 수염은 자못 무인의 풍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걸친 옷가지에 상투는 죄다 흐트러져 있으며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 ~ 1592)이었다.
명색이 도원수였지만 김명원은 병서를 많이 읽었다 뿐이지 실제 전투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문관이었다. 게다가 한강전투에서 자신의 실책을 숨기기 위해 왜군을 물리친 부원수 신각(申恪 ? ~ 1592)을 모함해 죽게 만든 용렬한 자이기도 했다.(단, 김명원은 도원수 자리에서 내려온 뒤에는 전시행정관으로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조정의 잘못된 인사가 가져온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한강 사수전에서 패한 김명원은 신각이 전선을 멋대로 이탈해 패했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그 시각 신각은 해유령에서 왜군 70명을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김명원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승전한 신각을 처형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인다.
이러한 일로 조정의 신임을 잃은 김명원은 임진강 전선에서는 명목상의 도원수였을 뿐 그 지휘를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임금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나가는 재상에게 부여된 정2품 임시 벼슬. 한응인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했던 와중이었다.) 한응인(1554 ~ 1614)에게 거의 맡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 김명원이었지만 이각이 눈앞에 나타난 그 순간, 김명원은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임진강은 경상좌병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어찌하여 경상좌병사가 임지를 버리고 이곳에 와 있는가!”
이각은 김명원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한 채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왜적이 강대하여 병사들은 흩어지고 이렇게 홀로 남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병사를 다시 모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고심 끝에 어가를 호위하기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김명원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푸하하! 어가를 호위한다? 지켜야할 곳조차 버리고 온 자네가 어가를 호위하러 여기까지 왔다? 하하하!”
이각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김명원은 손가락으로 이각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가 도망함으로 인해 경상도가 순식간에 함몰되었는데 어찌할 것이냐? 당장 죽어 마땅한 자로다!”
이각은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애원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대감의 종이라도 되겠소이다.”
김명원은 혀를 차며 이각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외쳤다.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말은 못할지언정 구차히 목숨을 바라는 것이냐! 여봐라! 이자의 목을 당장 베어라!”
처음부터 어긋난 이각의 행보
아무리 군권의 최고 책임자인 도원수라 할지라도 하급 관리도 아닌 무관직 최고 품계인 종2품 병마절도사를 그 자리에서 참수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은 조정으로 압송 후 처형하거나 보고를 받은 왕이 무직승지인 선전관을 보내어 처형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후에 아무도 도원수 김명원이 이각을 참수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 방어체계가 급히 붕괴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각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각이 맡은 직책인 경상좌병사는 경상좌수사와 더불어 왜군이 쳐들어올 경우 최전선이었다. 나름대로 전쟁징후를 감지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한 조선 조정이었지만 예상외로 엄청난 병력이 몰려오자 일선에 있는 모든 지휘관들과 지방관들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큰 전쟁이 난다고 해도 수천 명의 병력이 해안가 정도를 건드릴 것이라 예상했지 한 번에 만 명 이상의 대부대가 상륙해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도 모자라 이러한 대부대가 연이어 밀어닥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몰려왔다는 왜군의 수많은 배를 처음으로 접한 경상좌수사 박홍(1534~1593)은 배를 모아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박홍이 선택한 방식은 바다에서 싸우는 걸 포기한 채 동래성을 방비하는 것이었다.
이후 박홍은 수군을 이끌고 동래성 가까이 왔다가 전투가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 후퇴하고 만다. 병력수의 차이로 유리할 것이 없는 전투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성을 증축했고 해자도 갖춘 동래성이 불과 하루 동안에 무너진 것은 이각의 행보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왜군의 침입을 받을시 왜군과 접전하는 곳은 그 자리를 사수하고(부산진과 다대포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경상좌도의 병력은 동래로 집결한다는 체제가 갖춰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부산진이 함락되는 동안 동래성으로 울산 병영에 주둔해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이 이끄는 병력이 진군했고 경상좌수사가 동래근처 해안가로 이동했으며 양산군수 조영규(?∼1592)와 울산 군수 이언성(?~?)이 동래성으로 합류한다.
편제상 경상좌병사가 울산 병영에서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2천이 조금 되지 않았다. 부산진의 경우 경상좌수사가 지휘하나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600명 남짓한 병력을 첨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병력은 왜군과 최초로 맞닥트렸기에 다른 곳으로 합류할 수 없었다. 이는 다대포 첨사의 병력 800명도 마찬가지였다. 그 밖에 동래, 울산, 양산의 병력은 각 각 천 여명 남짓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대응체계상 동래성에 들어서야 할 병력은 총 5천 남짓이었다. 그리고 이 병력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인 이각이었다.
울산 군수 이언함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동래성에 들어선 이각은 그 동안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동래성이 방비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각은 양산군수 조영규를 불렀다.
“공이 먼저 병사들을 끌고 성 밖으로 나가 복병(伏兵)으로 적의 예기(銳氣 : 날카로운 기운)를 꺾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오.”
조영규는 휘하 병력 수백을 이끌고 동래성 밖 4km까지 진군한 후 매복을 실시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일본제 1군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카의 병력과 뒤이어 상륙한 지원군이 더해진 3만의 대군이었다. 조영규가 거느린 병력으로는 성밖에서 대군을 맞아 싸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영규는 퇴각하여 좌병사 이각과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보고했다.
“왜군의 병력이 엄청나게 많아 맞아 싸울 수가 없었소이다. 성을 지키면서 어서 한양으로 이 소식을 전해야 하오.”
동래부사 송상헌은 성을 지킬 의지를 굳게 다졌지만 막상 병력을 총지휘해야할 이각은 발뺌을 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성안에서 이렇게 있다간 반드시 패할 것이오. 난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성 밖에서 응원하겠소. 부사께서는 성을 지키시오. 그렇게 안과 밖에서 왜군을 치면 승세를 잡을 수 있을 것이오.”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송상헌은 이각의 말은 어불성설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당장 있는 병력으로도 넓은 동래성을 지키기 어려운데 이를 반으로 나누면 더욱 지키기 어려운 건 자명한 일이었다.
“병력이 부족하오. 성 안에서 같이 지켜야 하오.”
“그렇다면 내 휘하 병사들을 좀 남겨 두겠소.”
송상헌의 만류에도 이각은 군사 20명만 남기고 부하들을 이끌고서는 동래성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이각은 왜군의 모습조차 보지 않은 채 그렇게 빠져나갔고 동래성은 왜군과의 접전 끝에 방어가 허술했던 동쪽 성벽부터 무너져 하루 만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동래부사 송상헌, 양산군수 조영규, 조방장 홍윤관이 전사하고 울산군수 이언함은 포로로 잡혔다. 성안에 있었던 동래성 주민들은 왜군들에게 모조리 학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