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 패닉에 빠진 경상좌병사 이각 (2)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왜군과는 절대 마주치지 않겠다!

 

동래성이 함락됐지만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른 조선의 방어체제는 변함없이 가동되고 있었다. 후세 많은 비판을 받은 방어제제지만 적어도 임진왜란 개전초기에는 문제없이 그 체제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각이 동래성 구원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간 사이, 경상좌병영 소속 13개 읍군병력은 수천 명은 울산 병영으로 집결한 후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즈음 동래 부근 소산(오늘날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까지 퇴각해 온 이각은 휘하 최고 군관에게 명령을 내린다.


“너는 지금부터 쉬지 말고 말을 달려 병영으로 돌아가 내 첩과 면포 천 필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라.”


군관은 정색을 하며 거부했다.


“그렇게 하면 지금 병영에 집결해 있을 병사들이 크게 동요할 것입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각은 크게 화를 내며 칼을 빼어 들었다.


“명을 들을 것이냐 단칼에 죽을 것이냐!”


군관은 성 밖으로 나가 왜군과 싸우겠다는 이각의 말이 완전 거짓임을 깨닫고는 마주 언성을 높였다.


“명을 거두어 주소서!”


이각의 칼이 허공을 그리자 군관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른 병졸과 군관들이 그런 이각을 멍하니 보자 이각은 서둘러 말을 달려 홀로 병영으로 향했다. 이각이 이끌던 군사들은 그 길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도주할 생각만 하며 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각은 사람을 시켜 첩에게 먼저 달아나라고 일러둔 뒤 안동판관 윤안성(1542~1615)의 영접을 받으며 그에게 병사를 나눌 것을 제의했다. 윤안성은 의아해 했다.


“성을 버리고 진을 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게다가 병사를 나누자는 건 무슨 말입니까? 본래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을 어디 있습니까?”


이각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재빨리 말했다.


“내가 거느린 정병들은 성 밖에서 응원할 요령으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소 그러니 그대가 거느린 석전군(石戰軍 : 투석전을 전문으로 하는 병사들)을 떼어 주시오. 그대는 다른 판관, 현령들과 성을 굳게 지키면 될 일이오.”


이각이 구체적으로 나눌 병종까지 말하자 윤안성은 의심을 버리고 석전군을 떼어 주었다. 이각은 병사들에게 면포를 성 밖으로 날라 실어두라고 시켰다. 이각의 병사들이 물건을 나르느라 분주한 것을 본 윤안성은 의아해 하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느냐?”


병사들 중 하나가 외쳤다.


“면포를 옮겨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깜작 놀란 윤안성은 이각을 찾았다. 이각은 속으로 당황했지만 미리 생각해 놓은 꾀가 있어 겉으로는 태연히 윤안성의 부름에 답했다.


“왜 그러시오?”


윤안성이 크게 상기된 표정으로 성위에서 소리쳤다.


“면포는 왜 옮기시는 게요?”


이각은 태화강을 가리키며 윤안성을 위시한 성 위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 말에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며 어수선해졌고 이각은 말에 오르더니 서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제야 이각이 애초부터 달아날 생각만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윤안성은 크게 노해 칼을 빼어들고 달아나는 이각의 뒤통수를 보고 소리쳤다.


“네 이놈! 네 놈의 목을 베어 군문에 걸 것 이니라!”


윤안성은 당장 이각을 추격해 목을 베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마저 성을 나가 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병사들의 분위기가 더욱 안 좋아질까 염려되었고 주장을 보필하는 장수인 아장(亞將) 원응두의 경우에는 겁을 먹고 달아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안성은 한숨을 쉬며 달아나는 이각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음날 경상좌병영은 제대로 응전도 하지 못한 채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각이 놓쳐버린 명예회복 기회

 

연이은 이각의 도주는 왜군의 기세를 올려 주었고 결국 초기 조선군의 방어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진 주요 이유였다.


당시 경상좌수사 박홍도 왜군의 기세에 눌려 수군을 거느리고 싸워볼 엄두를 내지 않았고 연이어 왜군을 피해 다닌 바가 있었다. 하지만 박홍은 파발을 보내 처음으로 한양에 왜군의 침입을 알린 바가 있었다. 즉, 최소한 해야 할 일 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었던 것이다. 박홍은 임지를 버리고 평양까지 도망 왔으나 공으로서 죄를 씻으라는 명을 받고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운다. 그럼에도 몇몇 신하들은 박홍의 죄를 소급하여 엄벌에 처하라고 탄핵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박홍의 죄는 컸지만 평양까지 어가를 따라온 것으로 보아 자신의 뒤를 봐줄 사람을 찾아 목숨을 구하지 않았나 싶은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럼 역시 도주만을 일삼은 이각은 어땠을까. 난중잡록에는 이각이 비겁한 자였지만 일단 힘과 무예가 뛰어나 경상좌병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각과 박홍 외에도 임진왜란 초기에는 예상을 뛰어 넘는 왜군의 숫자에 제대로 대응도 해보지 못하고 숨거나 도주한 장수와 관리들이 많았다. 그러나 초기에 왜군과 맞닥트린 관리중 군사부분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이각과 박홍이 그보다 낮은 직급이었던 정발이나 송상현처럼 목숨을 던져 적을 막아내려 했다면 왜군이 그렇게 쉽게 한양까지 북상할 수 있었을까?


어쨌건 몇몇 지방 관리들과 경상도를 지나 빠져나온 이각은 한강 방어선을 지키지 않고 후퇴하는 도원수 김명원 부대로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임진강으로 향하는 길목인 혜음령에서 역시 임지를 벗어난 경상좌방어사 성응길과 함께 한양을 점령한 뒤 계속 북상하는 왜군을 저지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각은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고 곧장 퇴각하여 임진강을 건너가 버린다.


 

 

이래적인 처형

 

결국 이각은 도원수 김명원에 의해 처형당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왜 김명원은 이각을 즉시 처형하기로 마음먹었을까?


임진왜란 초기, 당시 조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대규모 왜군의 공격으로 인해 도주하거나 대응을 하지 못한 경상도 쪽 관리들에 대해 조선조정은 대부분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도 이는 부원수 신각의 일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당시 신각은 왜군과의 접전 후 그 진격을 막고 적을 참살한 첫 승리라는 공을 세웠음에도 도원수 김명원의 보고만으로 처형을 당한 바였다. 반면 김명원은 그로 인해 조정의 신망을 잃고 임진강 방어전에서는 명목상으로 도원수 직책만 지닌 채 실권을 잃고 있었다.


이런 김명원이었기에 너무나도 전투를 기피하는 게 자명한 이각을 직접 처형하지 않으면 도원수로서 군율이 서지 않는 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각의 일을 조정에 보고해 처형하게 한다면 앞서 신각의 일로 인해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김명원은 조선군의 사기와 실추당한 자신의 통솔력을 위해서 도주를 일삼고 비열한 행동까지 한 이각을 당장 처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만약 이각이 동래성에서 송상현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후속 군대가 속속 당도한 왜군을 막아내긴 어려웠을 테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제승방략에 따라 모인 조선군이 제때 한양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이일 등의 지휘하에 어느 정도 버텼을 가능성이 있었다. 남해를 지나 서해로 올라가려는 왜군은 당시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강적 이순신을 만나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일 뿐이다. 하지만 당시 초기대응에서 이각의 책임이 막중했으며 그의 도주가 조선군을 패닉에 몰아넣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로 인해 결국 이각은 동래성순절도를 통해 그 추한 모습이 후대까지 영원히 남는 희대의 졸장으로 각인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