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진주성 전투. 조선의 맹장, 목증판관(木曾判官)
1719년 일본 도쿄.
도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가부키 작가의 색다른 연극이 상연되고 있었다.
“모쿠소관이 길주에 진을 치는 도다!”
그렇게 시작된 연극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길주에 진을 친 고려맹장 목소판관은 팔각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방팔방 일본군들을 쳐부수었다. 고려국왕을 사로잡은 고니시와 가토가 달려들어 목소판관을 사로잡아 다리를 찢어 죽였다. 적을 잡아 귀를 베어 귀무덤을 만들었다...... 이를 본 히데요시는 이들을 격려해 마지않았다.’
이는 에도시대, 희곡 작품을 다수 집필하여 일본의 세익스피어라고도 하는 치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1653~1724)이 쓰고 1719년 처음 공연한 본조삼국지(本朝三国志)에 나오는 내용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내용인데다가 한국사람들에게는 의아한 이름마저 나온다. 목증관, 도는 목증판관 이라고 불린 조선장수는 대체 누구일까?
이 목소판관의 모델은 바로 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성을 사수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 ~ 1592)이다. 이 목소판관은 본조삼국지 외에도 몇몇 일본 희곡 작품에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목소판관이 위험한 인물로 등장한 뒤 격퇴되거나 목소판관의 후손이 일본을 뒤집어 버릴 요량으로 등장한 후 후일을 기약하며 격퇴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군이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이순신 장군의 경우 일본 다이묘들의 문헌에 간단히 언급만 되어 있거나 그 외 문헌의 경우 오히려 징비록을 참조한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는 당시 일본측에는 ‘이통제’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쩌면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기에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인지되어 희곡에 등장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거북선은 복카이센(沐海潛 목해선)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퇴치당한다는 내용의 연극이 나오기도 했다. 아마도 칠천량 해전에서 거북선을 포함한 조선군 선단이 패몰한 적이 있기에 쓰인 내용으로 보인다.
진주성 전투의 경우에는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처참하게 패하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막대한 희생을 치루면서 결국 진주성을 함락시켜 성안에 있는 조선민관군을 모조리 학살한바가 있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1592년 음력 10월 6일~10월 10일 벌어졌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로 꼽히는 진주 대첩이라고 부르고 있다. 30,000 가량의 일본군이 투입된 이 전투에서 10,000명 이상의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죽거나 다쳤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진주성에서는 김시민의 사기를 위해 사망을 공표하지 않고 장사를 지낸다. 이로 인해 당시 조정에서는 승전사실만 보고받고 김시민의 사망사실을 모른 채 경상우병사로 제수한다는 교지를 보내기도 했다.
패전사실을 보고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화를 냈다. 일본군 측에서는 목사 김시민을 '모쿠소'(木曾)로, 진주성을 '모쿠소조'(木曾城)로 부르며 복수전을 준비했다. 일본군은 전 병력을 단시간 내에 거의 대부분 집결시키는 놀라운 기동성을 선보이며 원군이 올수 있는 길까지 모조리 차단한 채 진주성을 공격한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벌어졌다. 일본군의 숫자는 1차때 30,000여명보다 세배 이상 많은 십만 대군 이었다. 경상도 남부 일대에 조선이나 명군의 배후 역습을 대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2만3천여 병력을 제외하고는 임진왜란 초기에 투입된 병력들 중 그 동안 사망했거나 전투력을 상실한 병력을 제외한 일본군의 거의 전 병력이 투입된 전투였다. 심지어 진주성 전투를 위해 바다를 막 건너온 부대마저 있었다. 진주성의 방어병력은 1차때 3,800명 보다 많은 6,000~7,800명 정도였다. 진주성은 1차 전투 때보다 사흘을 더 버텼으나 끝내 무너지고 성안에 있던 군관민 6~7만여명이 일본군에게 대학살을 당하고 만다.
성이 함락되기까지 진주성에서는 크고 작은 공방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진주성의 조선군은 쉴 틈도 없이 싸워야 했지만 일본군은 번갈아 가며 진주성을 들이쳤다. 비록 진주성이 함락되긴 했지만 일본군도 큰 타격을 입었다. 1차 진주성 전투때를 참고로 비교해보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최소 10,000에서 최대 20,000으로 추산된다. 일본군은 진주목사 서예원을 김시민으로 알고서 목을 베어 일본에 보냈다.
침략자들이 두려워할 만큼 그 의기를 보여준 김시민을 비롯한 진주성 군관민들의 숭고한 희생은 결국 전후에도 오랫동안 일본군의 트라우마로 남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