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차(飛車)는 정말로 임진왜란 때 활약했을까?(1)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1. 비차에 대한 기록들




1593년 6월 진주성.

진주성을 포위한 후 맹공격을 가하는 일본 병사들의 머리 위로 기묘한 것이 떠올라 가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일본군장수가 넋을 놓고 서 있는 병사들을 다그쳤다.

“저게 뭐건 간에 조선군이 띄운 게 분명하니 놓아 보내서는 안 된다!”

일본 병사들은 조총을 들어 날아가는 물체를 겨누었지만 맞출 수 없었다. 잠시 후 그것은 진주성으로 되돌아 왔고 안에 식량을 싣고 있었다......

 

사실 비차(飛車)가 언급된 문헌은 임진왜란 당대 서술된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비차가 임진왜란 당시 등장했다는 기록은 조선 철종 때의 실학자 이규경(1788년 ~ 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槁)의 비차변증설(飛車辯證說)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비차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등장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영남의 한 고립된 성이라고만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壬辰倭酋猖獗也。嶺南孤城。方被重圍。亡在昕夕。有人與城主甚善。而素抱異術。迺作飛車。飛入城中。使其友乘而飛。出行三十里。以避其鋒


(임진년에 왜군이 창궐했을 때 영남의 한 고립된 성이 겹겹이 포위를 당해 곧 위태로웠다. 이때 어떤 이가 비차를 제작하여 성중으로 들어가 그의 벗을 태우고 삼십리를 날아 지상에 내려 (왜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이밖에도 비거(飛車)라고 통칭되는 다른 비행체를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네 사람을 태우고, 곡형으로 풀무를 만들어 배를 두들겨 바람을 일으켜 떠서 공중에 올라가 백길 쯤 다닐 수 있게 했지만 겨우 각풍을 만나도 전진하지 못하고 떨어지며, 광풍을 만나면 갈 수가 없다. (원주사람이 만들었다는 비차)


-그 기술을 모방하려면 먼저 하나의 수레를 만들어 나르는 연처럼 깃과 날개를 달고 그 속에 기구를 설치하고 사람이 타서,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는 자벌레가 굽혔다 폈다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과 기운을 내게 한다면, 두 날개가 자연히 날아서 한 순간에 천리를 가는 형세를 짓는다. 줄로 가로 세로 엮어 매어 신축성이 있게 하고, 비차 속에서 풀무질하여 규칙적으로 센 바람을 일으켜 대기위에 뜨게 한다. (정조때 사람인 윤달규가 만들었다는 비차)


이에 앞서 신경준(1712 ~ 1781)의 여암전서(旅庵全書)에서도 비차는 언급된다. 여암전서에서 포거(抛車)를 언급하는 부분에 30리를 날았다는 비차를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이 역시 특정인과 특정장소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한글학자 권덕규가 쓴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에서도 비차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여기에 정평구와 진주성에 대한 언급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조선어문경위 제38과 ‘고인(古人)의 복습방법(復習方法)편’에 ‘정평구는 조선의 비거(飛車) 발명가로 임진란 때 진주성이 위태로울 때 비거로 친구를 구출해 삼십 리 밖에 내렸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어문경위는 국어교습서일뿐이고 비차에 대한 이야기는 국어교습을 위해 일례로 든 이야기일 뿐이다. 따라서 비차가 실제로 있었다는 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기타 문헌으로는 1917년대에 만들어진 김제군지에도 정평구가 비차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차를 만들었다는 정평구의 민담과 일화를 보아도 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흔한 이야기일 분 제대로 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 정평구라는 사람이 임진왜란 기간 당시 실제로 존재한 사람이라는 건 사실로 보이는데 그들의 후손이 족보에 정평구란 이름을 기록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비차에 대한 거짓 정보


어쨌거나 워낙 신비로운 이야기다 보니 정평구의 비차에 대해 전혀 근거 없는 자료 또한 퍼지고 있다. 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비차에 대한 기록은 일본측 기록인 왜사기(倭史記)에도 나와 있다.

 

: 전혀 근거 없는 말이다. 일단 왜사기라는 기록물 자체가 없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작성한 기록물이라면 스스로가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왜(倭)라는 말을 쓸 리 만무하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일본측 자료를 통틀어도 비차를 보았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왜사기라는 말이 나왔을까? 심지어 일본사기(일본서기가 아니다.)라는 역사서조차 없다. 그냥 막연히 ‘일본 역사서에 비차가 언급되어 있더라.’란 말이 와전되어 왜사기라는 문헌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왜사기에 대한 언급은 2002년 경부터 있었으며 임진왜란을 기록한 문헌이라는 짧은 소개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최소한 임진왜란을 기록한 일본 문헌에 ‘왜사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 문제는 비차가 기록된 출처가 ‘왜사기’라는 말이 일부 창작물이나 서적에 버젓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좀 더 세심한 고찰이 요구되는 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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