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도량형 정책변화 그들의 역사




'도'란 자를 이용한 길이 단위, '양'은 되로 잰 부피, '형'은 저울로 무게를 재는 것을 뜻한다.


요즘 종전의 도량형을 금지시키고 미터법으로 통일하게 한 것에 대해 다소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당장이야 혼란이 오겠지만 그 취지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한다.

사실 도량형에 대한 고민은 동서양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져 왔는데 여기서는 조선왕조 실록을 기본으로 도량형에 대한 고민을 살펴보겠다.

태종 17년

호조(戶曹)에서 탄(炭)을 거두는 법을 올려 아뢰기를,
“요즈음 선공감(繕工監)에서 정문(呈文)한 것으로 인하여, 정탄(正炭)을 수납한 휘[斛]를 비교하여 보면, 혹 15두(斗) 혹 20두 짜리가 있고 또 저울로 다는 것이 있어 경중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계문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고저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탄을 어찌 감히 말[斗]과 되[升]로 헤아리기를 쌀과 곡식같이 할 수 있겠느냐? 70근으로 한 섬을 삼아서 수납하고, 쓸 때에도 근으로 달아서 내어 주라.”

여기서 탄(炭)이란 숯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조에서 이 숯을 세는 도량형이 없어 임금에게 아뢴것이다. 이렇듯 도량형은 그 기준이 명확치 않을 때는 임금의 윤허를 받아야 할 정도로 중대사였다.

세종4년

임금이 공청이나 사가에서 사용하는 저울[稱子]이 정확하지 아니하므로, 공조 참판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개조하게 하였다. 이날에 이르러 1천 5백 개를 만들어 올렸는데, 자못 정확하게 되었으므로 중외(中外)에 반포하고, 또 더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사들이게 하였다.

이 해, 새로만든 저울과 종전의 저울이 같이 쓰이자 왕명으로 종전의 저울을 쓰는 것이 금지되기도 한다.

선조30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중국군에게 지급할 군량의 되와 말을 장 포정(張布政)의 자문에서 요동(遼東)의 되와 말을 쓰라고 하였고 지금 양 총병(楊總兵)의 패문(牌文)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느 때 요동의 1되는 우리 나라의 3되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 비용이 우리 나라가 마련한 수의 갑절이 넘습니다. 대저 두곡(斗斛)의 대소가 현격하여 피차가 각기 다르고, 각처에서 지출하는 즈음에 다시 기준이 없게 되면 모흠(耗欠)이 반드시 심할 것이니 극히 염려됩니다. 이런 내용을 급히 접반관에게 하유하여 쓰고 있는 되와 말을 자세히 살펴 치계하게 한 뒤에 호조로 하여금 각참의 되와 말을 자세히 정하여 낙인으로 관(官)자를 찍게 하여 지나친 손실이 없도록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다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의의 도량형이 같이 않아 생긴 일이었다. 단위를 지칭하는 말은 같은데도 이렇게 옛 도량형은 차이가 생기고는 했다.

그렇다면 미터법은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을까?

바로 고종당시 대한제국이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해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해 서양식 도량형제인 미돌법(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8년)에는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한게 시초다. 


이후 1964년 1월1일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미터제가 실시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