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15 조선을 위해 싸운 일본인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김충선 유적비 (출처 : 대구달성군 홈페이지)


임진왜란이 끝난 뒤 20년도 넘은 인조 2년 1624년, 이괄이 이끄는 1만 2천명의 반란군 선봉에는 130명의 항왜군(降倭軍)즉,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이 선봉에 서 있었다. 이들은 이괄의 수족과 같이 움직이며 이괄의 난에서 초반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시켜나갔다.

사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러한 항왜군은 조선군의 요소에 주요한 전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이들의 수는 수천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수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흡한 편이다. 이들이 모여 산 곳을 '왜막실'이라고 부르기도했고 여기서 유래된 성씨도 있다.(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럼 언제부터 일본병사들이 조선군에 편입되어 싸우게 되었을까?

처음으로 조선에 항복한 일본장수는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휘하의 좌선봉장 사야가였다. 사야가는 조선에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한번의 전투도 치루지 않고 자신의 부하들을 거느린 채 투항한 공으로 '김충선'이란 이름까지 받았다.

주로 김응서(김경서) 장군의 휘하에 편입되어 의령전투 및 기타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벼슬까지 받은 김충선은 이후에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도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란칭호와 정2품의 벼슬을 하사 받는다.

그렇다면 왜 김충선은 한번의 전투도 없이 조선에 투항했을까?

 김충선이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조선으로 투항한 것은 놀랍게도 '조선 문물에 대한 숭배'때문이었다.

김충선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도리상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김충선은 어쩔 수 없이 무장으로서 전쟁에 참가 했으나 겉만 일본인 이었을 뿐 속은 조선의 모화주의자처럼 유교적 관념에 충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김충선이 한 말에서도드러난다.

"명나라가 우리를 도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금수와 같은 오랑캐를 어찌 섬길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가 이제 끊어졌구나!"

1992년에는 김충선의 귀화 400년을 기념하는 비가 그 후손들이 살았던 집성촌인 대구 우록동에 세워지기도 했다. 그의 저서로는 '모하당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