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18 생각지도 않은 도우미와 배신자.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편전(애기살)과 편전을 넣어 쏘는 통아.

1592년 9월,  여진의 건주위 추장이자 청나라의 시조인 누르하치가  의주에 피난을 가 있는  조선조정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파견하겠다고 제의한다. 당시 여진에 대해 항시 경계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던 조선조정은 이 제의를 두고 명나라 요동 병부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논의를 벌이다가 이를 거절한다.

“이번에 여진(女眞)의 건주(建州)에 사는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이 하는 말에 의거하건대 ‘우리들의 땅은 조선과 경계가 서로 연접해 있는데 지금 조선이 왜노(倭奴)에게 벌써 침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이다. 노아합치(奴兒哈赤 : 누르하치) 휘하에 원래 마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싸움에는 이골이 났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가 우리의 도독(都督)에게 말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좋은 사람이니 반드시 위엄찬 화를 내어 정병을 뽑아 한겨울 강(江)에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왜노를 정벌 살륙함으로써 황조(皇朝)에 공을 바칠 것이다.’ 했습니다. 이 고마운 말과 충의가 가상하여 그들 말대로 행하도록 윤허함으로써 왜적의 환란을 물리치고자 하나 단지 오랑캐들의 속사정은 헤아릴 수가 없고 속마음과 말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니 선뜻 준신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다시 1598년 1월에 누르하치는 2만명의 원군을 보내겠다고 조선조정에 제의해 온다. 첫번째 제의때와는 달리 전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조선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왜군을 속히 몰아내자는 제의가 나오기도 하나 이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는 누르하치의 야심에 의해 시도된 일이었으며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조선을 부모의 나라라고 여기며 은혜를 갚기위해 생각해서 시도된 일은 아니다.



임진왜란중 수많은 항왜(降倭)가 있었지만 조선사람들 중에서도 왜군에게 협조한 이들이 나오기도 했다.

“길에 떠도는 말입니다. 신은 7월에 북청(北靑)을 지나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첫새벽에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적들이 추격해 와서 하마터면 잡힐 뻔하였습니다. 또 함흥(咸興)의 생원(生員) 진대유(陳大猷)는 왜놈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며, 한인록(韓仁祿)과 문덕교(文德敎)의【모두 함흥의 문관(文官)이다.】 아비가 의병을 일으키려 하자 대유가 적에게 고발하여 모두 살해당하게 하였습니다.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유영립이 선조에게 보고한 일인데 이는 나중에 실제로 확인된다. 진대유는 왜군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지만 후에 붙잡혀 대가를 치루게 된다.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에 대한 보고를 전한 고산 현감 신경희는 이런 얘기를 전하기도 했다.

상(선조)이 이르기를,
“적이 쏜 것 중에는 우리 나라 화살도 있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편전(片箭)에 맞은 자가 많았으니 적군 중에 필시 우리 나라 사람이 투입되어 전쟁을 돕는 것 같았습니다.”

이미 조총이라는 장거리 무기를 보유한 왜군이 조선 편전의 기술을 배워 이를 전투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 말은 왜군을 도와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뚜렷한 기록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런 배반자들이 지배층에 있지 않았고, 평소 조정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라는 점이 임진왜란사에서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이유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