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얼마 전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을 없애고 모두 육군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계획을 짜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다행이도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하는데,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14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해도(海道)의 주사(舟師)를 없애고 장사(將士)들은 육지에 올라와 전수하도록 명하였는데, 전라 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급히 아뢰기를,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므로 호남의 주사만은 온전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해안도 놀랍지만 여기서 주시할 것은 '호남의 주사만은 온전하게 되었다.'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충청과 영남의 수군과 배들은 임란 발발 직전에 해산을 명 받았거나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감축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일로 인해 원균의 수군 1만명은 해산이 아닌 육군으로 편입된 것이고 배는 단 3척만이 운영된 것이다. 임란 발발 후 원균이 파선 7척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방치해 놓은 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산진에 왜군이 연이어 상륙하기 전에 원균이 싸움을 피하지 않고 바다로 나가 요격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겠냐는 비판은 억지소리에 불과하다. 조정의 무능한 대응이 참사를 불러 일으킨 것이고 원균은 이를 무마시킬 정도로 앞일을 바라보는 능력을 가진 장수는 아니었다.
2. 칠천량 해전의 패전
원균이 두고두고 욕을 먹는 이유는 이순신을 대신해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고 난후 칠천량해전이라는 패배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원균 변호론이 대두 되었다가도 이 칠천량 해전의 책임을 따져 나가다 보면 원균 혐오론으로 인해 금방 퇴색되어 밀려나가고는 한다.
칠천량 해전에 앞서 도원수 권율은 적극적으로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균을 불러 곤장을 때린다. 실로 이는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권율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는 앞서 이순신의 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거듭된 패전으로 왜군이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자 공략에 어려움을 느낀 이순신은 조정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자연히 출전을 미루게 된다. 이 틈에 일본측의 기만 전술인 가토 기요마사 출병 정보 사건이 일어나고 이로인해 이순신은 정말로 나가 싸우기를 싫어하는 장수로 조정에 낙인이 찍혀 파직되게 된 것이다. 권율의 독촉은 이런 일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후에 사헌부에서는 '경솔한 생각과 부질없는 행동으로 원균(元均)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독촉했다가, 마침내 6년 동안 경영하여 어렵게 마련한 주사를 단번에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라며 권율을 탄핵하기도 한다. 권율의 실책은 조정의 탓도 있었음을 자각했는지 이 탄핵은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다.
어쨌건 권율의 독촉으로 원균이 끌고간 조선수군의 규모는 대중소 선박이 모두 합쳐 134척이었고 이를 상대하는 왜군의 규모는 대중소 선박이 600척에 이르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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