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전력의 차이라면 무기와 함선의 우수함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수비에 치중해야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순신때와 마찬가지로 연이은 수군의 승전보에 자만한 나머지 무조건 공격만을 요구했고 그로인해 원균은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는 모욕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칠천량 해전은 해전이라고 부를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악천후에 지치고 약간의 함선손실을 입고서 성과없이 돌아오던 조선수군중 주력군이 일본수군이 활개를 치고 있는 가덕도에 휴식을 하겠다고 배를 댄것이 화근이었다. 배에는 불이 질러졌고 함선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가덕도에 상륙해 있던 조선수군은 배에 오르지 못하고 전사했다.
그나마 함선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기에 이순신은 명량해전 이후 방치되어 있던 전선을 회수할 수 있었다.(명량해전 직전 회수한 배만 해도 전선 13척, 협선25척으로 추정) 단 병사의 수를 확보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아 이를 걱정하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출전할 수 있는 병사의 한계로 인해 명량에는 12척의 배가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칠천량 패전이후 원균의 행보에 대해서 흥미있는 대목이 있다.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 : 임금의 재가를 받음)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이 대목으로 인해 패전이후 당시 조정의 실력자인 윤두수, 이산해의 비호를 받고 있던 원균이 목숨을 부지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설이 대두되게 되엇다 정황상 이런 의심을 받을 대목은 이뿐만이 아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가덕도에서 살아온 선전관 김식의 보고인데 당시 소란의 와중에서도 김식이 목숨을 구해 한양까지 올라가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원균 또한 목숨을 부지해 빠져 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측 기록에 원균의 수급을 베었다던가하는 기록이 없는 점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더구나 칠천량 패전당시 전사한 것으로 보고된 장수들이 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어찌되었건 원균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조정에서는 원균을 전사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순신과 원균을 비교를 하다 보면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원균에 대한 불만을 적을 정도로 (음흉하다. 한심하다 등등)꼼꼼한 인물이었고 부하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사람을 대하거나 부하장병을 다룸에 있어 매우 거칠었고 전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위기에 빠진 군졸들을 구하러 가지 않는 행동으로 이순신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따라서 원균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좋을 리가 없었다.(사관의 평이나 징비록, 조방장 김완의 원균에 대한 기록은 저주 수준이다. 단순히 당파성이나 이순신과의 친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칠천량 패전으로 인해 그의 공적까지 모조리 폄훼되고 악역 취급을 받고마는 후대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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