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많은 책이나 역사다큐에서 '이순신 자살설' 에 대해 다룬 것을 살펴 보면 그 시작은 조선시대의 문신 이민서가 지은 김덕령 장군 전기 중 '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란 대목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5년 뒤에 이순신 장군의 묘지가 이장된 것으로 본 '이순신 은둔설'까지 흥미진진한 대목들이 많다.
그럼 이를 하나씩 따져 보기로 하자
거북선 연구의 권위자인 남천우 박사(66.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순신행장기를 소개하며 이순신의 전사기록이 허구라고 주장한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 이순신은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활을 쥐고 곁에 섰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하는 말이, "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 "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소리를 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 " " 그렇다. 게다가 시신을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 " 그렇습니다. 전투가 끝나기까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 그리고는 시신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희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뿐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남천우 박사는 이 대목을 두고 " 이 대목은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 " 라고 주장한다. " 그의 주장인즉 이 행장의 저자는 전사 현장에 있었다는 완의 친형으로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쓴 글이 아니며 내용은 연극의 대사라면 모르거니와 실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허위의 내용들이라고 주장하며 총에 맞고 나서 처음에는 필요한 말을 제대로 하였으나 곧바로 죽었다는 대목도 이상하지만 전투가 한창일때 총사령관 주위에 군인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말은 논할 가치도 없으니 총사령관 주위에 군인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에 대해 따져 보자. 판옥선에서 지휘관이 위치하는 곳은 당연히 누각이다. 이 누각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 위에 오를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이런 이유로 지휘관의 죽음은 충분히 가려 질 수 있다.
참고로 오늘날 그려진 노량해전 민족기록화를 보면 누각이 불확실한 이상한 판옥선 갑판위에 이순신 장군이 그대로 누워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런 그림은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이순신의 전사사실을 배안의 이들이 다 알았다고 한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그런데 이 기록은 조선왕조 선조실록에 전해지면서도 정식적인 기록이 아니다. 이 대목은 사관이 한 말이라는 점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사신은 논한다.'란 대목은 사실을 기록하는 측면보다는 논평이며 사관이 이를 정식적인 기사로 쓰지 않은 것은 들은 풍문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선조 수정실록을 보면 오히려 행장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이순신 자살설을 추적해 보면 '추측일 뿐'이란 결론이 나올 뿐이다. 이순신 스스로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지만 이는 노량해전이 처음은 아니었으며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는 방식으로 자살을 할 장수는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기본적인 상식선에서부터 이 추론은 어긋나 있다. '은둔설' 또한 흥미진진하기는 하나 증거가 미약한 추정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왜 이순신 자살설이 조선시대의 '이민서'라는 사람에게서 제기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민서는 숙종 때 광주목사로 재직 중 비운의 의병장 김덕령을 배향, 즉 제사로 모시도록 배려를 한다. 김덕령에게 역적이라는 오명이 벗겨진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민서가 '김충장공유사'란 김덕령 전기를 쓴 것은 일종의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덕령은 임란 중 발생한 '이몽학의 난'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한다. 일본군이 그 초상화만 보고도 오금이 저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성들의 신망이 높았던 김덕령 장군 이었기에 사후에도 그에 대한 민담 또한 관련지역에 많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조정으로서는 김덕령은 관군이 아닌 의병장이면서도 민심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할 인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