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영웅의 야심은 처음부터 펼쳐지기 보다는 그 전공으로 대중의 신임을 얻었을 때 서서히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체제밖의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은 조선조정으로서는 분명히 '양날의 검'이었을 것이다.
이런 김덕령을 존경해 왔던 이민서는 체제순응적 이었지만 조정에 의해 핍박도 많이 받았던 이순신 장군을 두고도 김덕령과 같은 맥락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민서가 본 이순신은 결국 조정의 의심을 피하고 자신의 충정을 보이기 위해 전장에서 죽음을 택했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 조정은 이순신의 모반을 염두에 두고 전전긍긍한 사실이 있을까? 적어도 그런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선조의 의심증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칼의 노래'같은 소설과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드라마에서 부각은 시키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은 상상력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말년의 선조는 의심증으로 인해 세자인 광해군조차 멀리할 정도 였다. 이순신과 선조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을 직접적인 계기인 이순신 압송전에도 선조는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다른 장수로 이순신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비변사에서 공을 세운 이순신의 품계만을 올려주면 선조는 얼마후에 굳이 원균과 이억기 등의 품계를 같이 올려주고는 했다. 이는 선조의 독단적인 판단이라기 보다는 주변의 입김이 강하게 적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순신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계미년 이래 사람들이 모두 거짓되다고 하였다. (중략)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武將)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상이한 평가를 접해야만 했다. 당파에 따라 원균의 공을 높여 보는 측과 이순신의 공을 높여 보는 측이 갈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공을 보고하는 장계를 이순신이 먼저 보낸 일 이후로 계속 틀어져만 갔다.
이후 칠천량에서의 패배로 원균은 목숨을 잃게 되고 이순신은 홀로 수군의 모든것을 떠맡게 된다. 이순신에 대한 조정의 평가는 이때부터 매우 높았고 선조 또한 이순신의 공을 높여야 한다는 말에 따를 뿐이다. 그러나 후에 공신을 논할때 선조는 비망기를 통해 원균을 2등 공신에 놓는 것은 온당치 못하면서 1등 공신에 넣기를 명하고 심지어는 이순신의 공을 폄훼하는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후략) - 조선왕조 실록 선조 비망기
이런 군주를 위해 충성을 다바친 이순신이 안타깝게 비추어졌을 거라는 점은 당연지사였다. 그렇다고 당시의 유교통념으로 선대왕을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순신의 전사를 빗대어 그의 충정을 높였고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이순신 자살설과 은둔설이 불거져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