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1 왜 임진왜란 이야기를 하는가?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왜 하필이면 임진왜란인가?

임진왜란에 대한 얘기는 책이나 학교에서 배운 지식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하필이면 왜 임진왜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지 고리타분하게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임진왜란의 전반적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덜 알려진 사실들이나 역사상의 논쟁거리를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다. 때때로 필자의 오판내지 잘못 전해지는 사실이 있다면 가감없이 지적바란다.


임진왜란은 당시 역사를 볼때 일본이 처음으로 무력 해외진출을 꿈꾼 사건이다. 백제 멸망시 백촌강 하구전투가 있었지만 그것은 백제의 구원을 위한 응원병에 지나지 않았고 싸움이 백제-왜 연합의 패배로 끝난후에는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우려한 왜측에서 성벽을 강화하는 등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당시 왜의 국력은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에게는 다행히도 나당전쟁으로 인해 이런 일은 현실화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이제껏 일본사회의 기틀을 이루어왔던 봉건영주시대를 접고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는 초기 단계에 이루어진 침략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봐야 한다.

그 이전의 일본역사는 '역사책이 피로 물들어 흐른다.'란 얘기를 할 정도로 서로간의 다툼이 심했다. 이러한 무력쟁탈의 힘을 밖으로의 침입으로 옮겨놓았다는 얘기는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또 어떤 학자는 임진왜란을 '문화약탈을 위한 전쟁.'이라고 보기도 한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변방의 국가가 힘을 키워 주변국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하다 유럽에서는 프로이센이 그랬고 동양에서는 몽골이 그랬다. 프로이센의 인근에는 강대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있었지만 결국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몽골의 인근에는 강대한 금나라와 문화적으로 부유한 남송,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서하가 있었지만 비참하게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일본의 옆에는 문화적으로 부유한 조선과 명이라는 두 국가가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일본이 현실적인 위협이 될것이란 사실에 안이하게 대처했다. 조선은 뒤늦게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상황을 알아보려고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에서 17세기는 세계사적으로 각 국가의 민중들이 눈을 뜬 시점이기도 유럽의 제국들이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에스파니아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은 마악 해외시장 개척에 활로를 개척중이었고 유럽의 종교분쟁은 불화의 씨앗을 더욱 키워가고 있었다. 명나라는 명나라의 덜떨어진 황제들 중에서도 최악으로 평가받는 만력제의 통치하에서 농민반란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스만투르크는 강력한 군주 술레이만1세의 사후에도 그 후광으로 번영하고 있었으며 무굴제국은 악바르 대제의 통치아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내리막은 매우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이슬람 문화권이 비대해진 제국의 유지에 신경을 쓰느라 지체한 반면 동아시아는 변방의 일본과 만주족이라는 세력의 대두로 인해 그 발전이 지체되었던 셈이다.

임진왜란을 세계사적인 흐름에 비추어 봤을때 그 의미는 자뭇 달라보이기까지 하다.  세계사라는 것은 이렇게 시야를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