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2 전쟁초기 왜 조선군은 무기력했는가? 임진왜란이야기+역사이야기

<송상현 동상>


고시니 유키나카가 이끄는 1만 8천명의 일본군 선봉이 부산 영도에 상륙한 것은 1592년 4월 13일의 일이었다. 이후 5월3일 한양이 함락되기까지는 단 18일이 걸렸을 뿐이었다. 당시는 부산에서 한양까지의 길이 곧게 닦여있지 않은 것을 감안할 때 일본군은 하루 25km이상을 행군했다는 얘기다. 당시 일본군은 거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하루 25km의 행군이 그리 무리한 일정은 아닌걸로 보인다. 하지만 중간에 조선군의 저항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떨까?

부산진성과 동래성에서의 저항은 각각 4월14, 15일 하루씩으로 그친다. 봉화체계로 인해 이 사실이 한양의 조정에 알려진 것은 4월 17일이고 조선조정에서는 하루동안 논의를 거쳐 대비책으로 유성룡을 도체찰사,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소백산맥. 조령. 죽령. 추풍령에 방어선을 편성하게 된다.

이 후 6일간은 교전없이 일본군의 북진과 후속부대 상륙이 계속된다. 4월 25일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 제 1진을 요격하지만 패전한다. 4월 26일에는 문경에서 현감 신길원이 결사전을 펼치다가 순국하고 4월 27일에는 전쟁초기 조선군 최대의 방어전인 유명한 탄금대 전투에서 8천명의 조선군이 전멸당하고 만다. 이후 조선조정은 한강 방어선을 계획하지만 별다른 저항없이 무력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행군을 멈춘기간은 5일, 그 중에서 탄금대 전투를 제외하곤 한나절 안에 끝난 전투가 많다고 해도 거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일본군이 부산과 한양을 보름만에 돌파한 셈이다. 이 정도면 그냥 유유히 한양까지 걸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물론 이는 '기습'에 당했다는 측면도 있기는 하다. 재미있게도 훗날 일본군에게는 임진왜란 - 청일전쟁 - 노일전쟁 - 진주만 공격 등으로 이어지는 기습의 전통이 이어진다. 그런데 조선조정이 전혀 전쟁의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지만 이는 매우 안이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이 대군을 이끌고 전면전을 펼친다고 해도 도성까지 함락당하리리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물론 '기습'론에 대해 반론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이 기습의 의미를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 현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후방의 보급과 병탄을 신경쓰지 않고 빠르게 상대의 수도로 진격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조선은 이런 '기습'을 병자호란때 다시 당하게 된다. 하지만 병자호란때는 기병의 진격이 있었고 임진왜란의 일본군은 보병만으로 빠른 진격을 하는 당시 조선조정 내지 방어군으로서는 예측 불허의 행동을 보였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이는 일본군의 목적이 '한양함락'에 이은 조선조정의 항복에 있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다음 목표는 당연히 명나라일 터였고 이를 위해서는 신속하게 조선땅에서의 싸움을 끝내는 것이 일본군으로서는 필요했다. 일본으로서는 조선을 명을 치기 위한 일본군의 보급물자를 감당하는 후방기지로 활용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 터였다. 일본군은 임진왜란을 개전하며 조선땅에서만 무려 7년간의 지리한 싸움이 이어지리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은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