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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 - 25 이순신 자살설의 배경(1)

신기전(神機箭)이미 많은 책이나 역사다큐에서 '이순신 자살설' 에 대해 다룬 것을 살펴 보면 그 시작은 조선시대의 문신 이민서가 지은 김덕령 장군 전기 중 '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란 대목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5년 뒤에 이순신 장군의 묘지가 이장된 것으로 본 '이순신 은둔설'까지 흥미진진한 대목들이 많다. ...

임진왜란 이야기 - 24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전선(戰船)

일본수군의 해전전술은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방식에서 변하지 않은 채였다. 일본수군은 배를  접근시켜 병사들이 상대방 배로 뛰어오르는 단병접전을 즐겨 사용했으며 조총의 보급으로 그나마 예전보다는 수군의 원거리 공격무기를 좀 더 충실히 갖출 수 있는 정도였다.물론 일본도 미약하게나마 대포주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일본수군은 왜...

임진왜란 이야기 - 23 거북선은 철갑선? (2)

-이순신 가문 소장 거북선 그림임진왜란 기간 중 거북선은 몇척이나 운용 되었을까? 기록으로는 단 3척이다. 단 이순신장군은 거북선을 언제나 선두에 세움으로서 그 효용성을 높였던 것 뿐이다.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판옥선'이었다. 다시 한번 의문을 던져보자면 세계최초를 떠나 거북선은 과연 철갑선일까? 여기서 용어의 정리가 필요한데 '철선'이...

임진왜란 이야기 - 22 거북선은 철갑선? (1)

거북선에 대해서는 이순신 장군을 신격화시켰던 박정희 정권시절 '이순신장군이 발명했다.'는 얘기가 우세하였다. 하지만 태종 때부터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점이 뒤늦게 부각되자 이순신은 이를 개량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순신 휘하의 군관 나대용이 거북선 개량의 장본인이라는 설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야기 - 21 이순신과 원균(3)

이러한 전력의 차이라면 무기와 함선의 우수함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수비에 치중해야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순신때와 마찬가지로 연이은 수군의 승전보에 자만한 나머지 무조건 공격만을 요구했고 그로인해 원균은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는 모욕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칠천량 해전은 해전이라고 부를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악천후에 지치고 약간의 함선손실...

임진왜란 이야기 - 20 이순신과 원균(2)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얼마 전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을 없애고 모두 육군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계획을 짜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다행이도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하는데,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14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해도(海道)의 주사(舟師)를 없애고 장사(將士)들은 육지에 올라와 전수하도록 명하였는데, 전라 수사 이순신(李舜臣)이 ...

임진왜란 이야기 - 19 이순신과 원균(1)

예전부터 제기 되어온 의문이지만 '이순신은 충신, 원균은 간신'이라는 공식은 과연 옳은 것일까?이재균씨가 지은 '원균을 위한 변명'에서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담긴 원균의 모습이 다른 것에 초점을 두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선조실록에서는 '이기고 싸운 공은 이순신과 같은데 그의 공을 오히려 이순신이 가로챘다.'는 말까지 하고 원균을 1등 공...

임진왜란 이야기 - 18 생각지도 않은 도우미와 배신자.

-편전(애기살)과 편전을 넣어 쏘는 통아.1592년 9월,  여진의 건주위 추장이자 청나라의 시조인 누르하치가  의주에 피난을 가 있는  조선조정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파견하겠다고 제의한다. 당시 여진에 대해 항시 경계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던 조선조정은 이 제의를 두고 명나라 요동 병부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논의...

임진왜란 이야기 - 17 임진왜란에 참전한 포르투갈인

1995년, 조선시대 화공 김수운이 그린 명나라군사들의 철군 장면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 일이 있었다. -천조장사 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이 그림의 좌측아랫 부분을 보면 특이한 모습의 사람이 그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명나라 장수 팽신고는 이들을 신병(神兵)이며 파랑국 사람들이라 선조앞에서 소개한다. 그들의 외모는 이...

임진왜란 이야기 - 16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대구에는 '대명동'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 지명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두사충은 이여송의 참모로서 조선에 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일설에는 벽제관 패전의 책임으로 참수당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한다. 후에 수군 제독 진린의 수하로서 이순신 장군과도 친분을 쌓았다. 두사충은 사실 진린과의 처남이었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에 따르면 두사충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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